누가 날 위로 하지!
누가 날 위로 하지!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12.22 18:59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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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소설가

경기남부에 눈이 오는 관계로 북부인 이곳은 아침부터 하늘은 잔뜩 흐렸다. 내 마음의 작용도 그다지 개운치는 않고 씽쑹쌩쑹 했다. 정오 무렵이 되어 급기야 짜증까지 목을 치밀었다. 한동안 사라졌나 했는데. 나는 지병처럼 느닷없이 짜증이 치미는 증세가 어렸을 때부터 있어왔다. 목으로 그것이 치밀어 오를 때는 마치 지렁이 같은 뭔가가 올라오는 것처럼 물리적인 짜증이다. 꽤 고민을 했지만 이유도 처방도 못찾고 달거리 현상인가 할 뿐이다.


오후가 되면서도 기분은 별로 달라지지 않아 모처럼 낮잠을 조금 잤다. 낮잠이란 그다지 단잠은 못되어 이내 부스스 깨면서 윤복희 선생이 불렀던 ‘여러분’ 이라는 가요가 문득 생각났다. '내가 만약 외로울 때면 누가 날 위로해주지' 라는 가사가 특별히 뇌리에서 맴을 도는 것이었다. 나는 제법 힘차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동네를 한바퀴 돌았다. 기분은 금방 좋아졌다. 좋아지는 기분은 언제나 어느 만큼은 방정스러운 데가 있어서 급격히 방정스럽게 감사는 마음을 도로 찾았다.

인도 철학자 라즈니쉬가 ‘밥을 먹을 때 밥을 먹는 것을 생각하면 명상이며 밥을 먹는데 밥을 먹는 것 이외의 생각을 하면 분열이다’라는 의미의 말을 했다. 그는 명상은 그렇듯 간단한 것이라는 걸 말하기 위해 그랬던 것으로 기억난다. 오전에는, 아니 어제부터 딸이 함께 외출을 하자는 통에 가벼운 정신분열증을 앓았던 모양이다. 딸이 어딘가 봐둔 옷이 있었고 그것이 사고 싶으니까 엄마와 함께 나들이를 하고 싶다고 조른 것이었다. 그냥 옷을 사달라고 조르면 안 먹히니까 늙은 엄마를 ‘함께’ 한다는 조건을 내건 것이다.

그런데 나는 사실 시간을 뺏는 걸 제일 싫어한다. 게다가 쇼핑은 질색이다. 그런 걸 딸은 제 또래들이 쇼핑을 좋아한다는 생각만 하고 작전을 짠 것이고 나는 칭찬할 일도 있고 해서 속아주려고 했는데 끝까지 속아주질 못했다. 미안해서 카드를 주며 소비할 액수를 나름 넉넉히 정해서 딸을 달랬고 딸은 동의해서 친구과 외출을 해서야 나는 비로소 혼자가 됐다. 혼자 만세!!! 혼자가 되어서야 낮잠을 잤고, 깼고, 산책을 갔으니까.

우선 살아있어 하늘을 볼 수 있어서 감사하고 돌아갈 집이 있어서 감사하고 가족이 있어서 감사하고 집밖에서는 일을 못할 정도로 인사할 이웃이 많아서 감사하고 감사한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감동시켰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나를 위로해줄 사람은 나 자신이 가장 유력하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스스로의 자각이 어찌나 대견하던지, 자각을 한 스스로가 어찌나 고맙던지.

더 고마운 자각은 그 다음이었다. 나를 위로하는 나는 타자에게 감사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을 진정으로 위로할 수 있다는 이 명백한 자각이었다. 그 자각을 의식하고 일상생활에서 지속해 나갈 때 그 일상 자체가 일파만파 삶을 확장시켜 풍성하게 한다. 습관이 안 되면 지속하기가 어렵다. 선행을 습관들이는 과정에서 우리는 종종 좀 거북한 마음을 경험한다. 감사는 마음이 마치 억지나 의무인 것처럼 느껴져서 진심어린 선행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하면 내 생각으로 선행을 하자고 하는데 마음속으로 얼마간 지금하는 행동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나 아닌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바로 내가 하고 있는 것이라는 의식을 해야 한다. 이런 때에 억지로라도 선행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의식이 지속해가는 동력이 된다. 선행이 좀 하기 싫을 때는 좀 하기 싫어하는 나 자신도 이해해주면서 계속하면 어느새 습관이 될 것이다. 어느새, 달라지는 스스로의 인생을 발견할 것이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귀한 내 인생인가. 두 번도 살 수 없는 오직 한번 주어진 내 인생이다. 게다가 모든 생명은 살기 위해 태어났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 것을 상기하면 일초일각도 허투루 보낼 수 없다. 살기 위해 태어났기 때문에 생물은 불행보다는 행복하기에 편리하고 유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울기보다는 웃기가 더 편하고 죽기보다는 아무래도 살기가 쉽지 않은가. 물론 자신속의 선량함으로 살 때에만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혼자서 선량한 행위로 행복하게 살기는 어렵다. 뭐든지 나누어야 제 맛이지만 인생의 행복은 진정 나누어야 제 맛이다. 이인 삼인 오인, 삼삼오오 무리지어 함께 해야 지속하기에도 쉽다. 혼자서는 선행을 지속하고 그것으로 스스로를 위로해서 풍성하고 즐거운 인생을 지속할 수 없을 것이다. 함께하는 인생은 불행이 범접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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