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기부문화와 전통
경남의 기부문화와 전통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12.30 18:40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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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실장
 

일제강점기 1920년대 일제의 수탈과 탄압으로 굶주린 백성이 3백만 명이 넘었다. 1년에 6000여명이 굶어 죽었다는 보도가 있다. 이 때 경남지역 애국청년들이 떨쳐 일어나 기근구제회를 조직해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을 도운다. 1921년 11월 진주기근구제회를 조직해 발기하고 집행위원을 뽑았으나 일제당국은 시기상조라고 발기를 방해했다. 집행위원들 대부분이 항일투사 박재표. 박진환. 김재홍. 강대창 등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었다.

근대식 기부자의 최초는 진주시 지수면 지신정 허준(許駿)선생이다. 허준은 42세 때 진사시에 급제하고 1903년 통정대부 비서원승에 임명된다.

진주군수가 허준의 자선과 독지에 대하여 포상을 청원할 정도였고 근대식 교육 기간인 일신여고(진주여고)의 기초를 세운 분이다.

진주시 내동면 부호 박재호. 박재표 선생은 진주시 계동 자기 소유의 2천 여 평을 진주청년회관 건립 및 축구 운동장으로 기부했으니 축구 진주의 기초를 세운 분이다.

박필종 선생은 교육 기관의 설립비와 남명 선생을 기리는 비석 건립비를 기부하고 빈민을 위해 토지를 분배하기도 했다.

1921년 3월에는 진주자선회가 발기했는데 회원수가 8백 여명이었다. 정봉욱 선생은 극빈자의 호세를 대납하고 고아. 과부 60여 명을 찾아가 각각 1원씩 기부하고 또 수재민을 위해 기부해 위로했다.

정태석 선생은 소작인을 위해 기부하고 신간회 설립비 등을 기부했다. 진주 도동에 사는 김만수 선생은 보통학교 설립비를 기부했다.

형평운동가 강상호 선생은 봉래초등학교 전신인 봉양학교 설립을 위해 기부하고 가호동 일대의 동민들을 위해 호세를 10여 년간 대납했다.

1926년 10월 예기권번 일동이 연주수익금을 진주유치원을 위해 기부했다고 동아일보에 보도됐다.

김기태 선생은 1931년 5월 일신여고를 위해 기부금을 제공하고 고려대 전신인 보성학교 위해 거액을 기부해 종신이사로 추대되었다.

금산면 갈전리 고재일 선생은 소작료를 반으로 줄이고 지세 공과금을 대납했고 교육 기부의 수범 사례로 꼽힌다.

연암 구인회 선생은 홍문관 교리 구연호의 손자로 진주 중앙시장에 구인상회를 개점해 번창하고 부산으로 옮겨 부산 국제시장에 조선흥업사를 설립하니 오늘날의 LG와 GS의 모체가 되었고 진주시립도서관. 연암공업대학교를 설립해 기부문화의 선두주자로 활약했다.

진주출신 인사들이 기부문화의 확산과 수범을 보여 그 후손들이 복을 받아 잘되고 성공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진주시에서 실시하는 좋은 세상에 작은 금액 또는 5백만원씩을 기부해 선행을 실시하니 전국 시.군에서 찾아와 수범사례를 배워 가니 좋은 일이며 아름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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