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읽기
신춘문예 읽기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1.05 18:40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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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소설가

매년 1월 1일이면 입이 찢어져라 웃는 사람들이 몇몇 있다. 물론 이런 저런 이유로 웃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지만 내가 오늘 여기서 말하고자하는 사람은 각 일간지가 주관하는 신춘문예에 당선한 사람들이다. 꼭히 당선자들뿐 아니라 당선자를 만든 사람들도 인상이 깊어 뇌리에 맴도는 걸 근간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는 그 웃음들을 볼 때마다 우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을 짐작한다. 나만 해도 지방신문 문예공모 최종심에 올랐을 뿐인데도 펑펑 운 기억이 새롭다. 처음으로 최종심에나마 올라서 설움이 북받쳤던 모양이다.


최종심, 이게 환장하는 거다. 내 경우엔 처음 최종심에 오르고 그 다음 해의 공모에서 당선을 먹었다. 참으로 다행한 일인 것이 지인 중에는 최종심에 거의 열 번을 오르고도 기어이 등단을 못하는 경우도 봤다. 지금도 진정으로 안타깝다. 아주 조심스럽게 진단을 해보자면 그 지인의 경우엔 독창성에 대한 문제가 아닌가 생각되어진다. 독창성, 이게 또 환장하는 거라.

도대체 독창성이 뭐란 말인가? 이번 신춘문예의 심사평을 읽어봐도 이 독창성이란 것 때문에 울어야 하는 사람이 많았고 웃어야 하는 사람으로 분류가 되기도 했다. “문장도 안정감이 있고 구성도 탄탄하고.........운운....... 다만 신인다운 패기가 약했다. 많이 쓴 내공이 엿보이지만 새롭게 보여주는데는 미흡했다. 이미 식상한 듯했다.....운운.............. .” 이게 그놈의 독창성이 모자랐다는 말이잖은가? 원, 미꾸라지처럼 얄미운 놈 하고는, 잡기만 했단봐라, 하고 땅땅 꼬나보지만 잡혀야 말이지.

근데 진짜로 독창성이란 놈을 꽉 사로잡아서는 아주 멋있게 요리를 해서 내놓은 사람도 있다. 이번 신춘문예에서도 일단 한 사람 발견! 바로 ‘원재운’이란 만 서른 살이 된 청년이다. 와아~ 부러워라!!! 여러말이 필요 없겠다. 여기 그를 당선시킨 소설가 김인숙과 성석제 선생님의 심사평을 인용한다. “당선작인 원재운의 <상식의 속도>는 혜성처럼 뜨겁고 거침없이 ‘상식 밖의 속도’로 내달리는 문제작이다. 팽팽하게 긴장된 문장과 장르와 시공을 자재하게 넘나드는 활달한 상상, 이야기의 근원적인 힘을 생각하게 하는 서사는 누구도 가보지 못한 소설 문학의 땅을 굴착한다. 오늘보다 내일의 폭발과 섬광이 더 기대되는 새로운 작가가 등장했다.” 극찬이다. 아니 극찬 그 이상이다.

이렇게 독창성란 걸 잡은 행운아는 사고를 치게 되어 있다. 독창성이란 것이 워낙에 지독한 놈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어쩌다 한번 손에 넣었다한들 계속 움켜쥐고 있으면 폭삭 썩어버리거나 낡아버린다. 그러면 예술가는 또 다른 독창성을 찾아 정처없이 지난하게 지옥을 헤매듯 헤매야 한다. 그 지독한 걸 찾는데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일찌기 석가모니가 창안한 묘법이 있기는 하다. 관찰!!! 관찰은 사랑이다. 봐라, 관찰없이 어떻게 애정이 생산되는가? 관찰없이 어떻게 이해가 이뤄지는가? 그것 없이 양보가 우러나오는가 말이다. 관찰은 이쯤 해 두고 넘어가자.

위의 원재운을 뽑은 성석제 선생님, 감히 야속하다. 내가 확인한 것만으로도 굴지의 주류 일간지 4개 신춘문예에서 최종심사를 봤다. 무조건 심하다. 설사 더 많은 곳에서 심사 의뢰가 들어왔겠지만 사양해야 했지 않을까? 저 정도의 명망이라면 이미 개인은 아니다. 공인으로써 한쪽으로의 쏠림을 걱정해야 더 바람직한 게 아니었을까? 님이 보시기에 성실하고 실력은 있지만 조명발을 못받고 있는 선배나 후배에게 양보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승자독식, 빈익빈 부익부, 그 징그러운 걸 님마저 하시다니!!

어느 시나리오작가가 굶어서 유명을 달리한 적이 그리 먼 이야기가 아닌 현실이다. 소설가 중에 누군가 쌀값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인가? 명망이 높은 사람들이 양보하고 도와주고 이끌어주는 곱고 장한 선례를 만들고 퍼뜨리면 우리 같은 장삼이사들이 얼마나 신이 날 것인가! 얼마나 마음이 따뜻해질 것인가. 그래서 가진 건 없지만 그래도 나한테도 양보할 것이 있나 찾아서 서로 서로 나누며 덩달아 행복해지지 않겠는가 말이다. 넘어가자.

신춘문예, 좋은 제도인가 나쁜 제도인가! 논란이 많다. 내 속에서도 논란이 일 뿐 뾰족한 대안이 없다. 내가 등단하기 전후만 해도 크고 작은 문예지가 등단 절차를 밟게 해주는 데가 많았다. 그 많던 싱아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듯 그 많던 문예지는 다 어디로 갔을까? 그런 문예지는 거의 사라지고 지금 이렇게 굴지의 재벌 일간지들만이 남아서 신춘문예를 더 빛내고 있는 것일까? 혹시 재벌 일간지들이 그런 작은 문예지들을 사사삭, 자객이 목표물의 목을 베듯 베어버린 건 아닐까. 문학이든 뭐든 재벌들에게만 줄을 서야 된다는 재벌법칙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 말이다. 별 생각이 다 든다. 어쨌든 신춘문예는 새해 첫날을 달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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