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에 대한 생각
비판에 대한 생각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1.07 18:38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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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나는 개인적으로 ‘비판’이라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어떤 사람을 드러내놓고 비판하는 것은 더욱 좋아하지 않는다. 가능하면 사람의 좋은 면들을 평가하고 칭찬하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그런데 꼭 그런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비판이 반드시 필요한 경우도 있는 것이다. 사회의 문제해소와 발전을 생각할 때 더욱 그렇다. 그래서 작정하고 비판을 한번 해보려 한다. 나는 철학자이니 기본적으로 일종의 비판자격을 가지고 있다. 철학의 역사에는 ‘비판’을 전면에 내세운 칸트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 {실천이성 비판} {판단력 비판}을 썼고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창시자 호르크하이머는 {전통이론과 비판이론}을 썼다. 딜타이의 {역사이성 비판}도 있다.) 물론 이들의 비판은 그 대상 내지 내용이 한참 다르다. 칸트는 이성 및 판단력이 그 대상이었고 호르크하이머를 위시한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변질된 계몽 등 문제적인 사회현실이 그 대상이었다.

일반적으로는 ‘비판’이 ‘비난’으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그 둘은 엄연히 구별된다. 철학의 경우, 특히 칸트의 경우는 그것이 ‘음미’(Pruepfung)의 뜻으로 사용된다. 무언가를 철저하게 분석-검토해보는 것이 비판인 것이다. 물론 거기에도 ‘무언가 문제적인 것’에 대한 지적은 깔려있다. 요즘 젊은이들은 ‘지적질’을 싫어한다고 하는데 그래도 할 수 없다. 문제를 해소하고 너 나은 상태로 가기 위해서는 그런 지적질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건 헤겔 변증법의 바탕에 깔린 정신 내지 전제의 하나이기도 했다.

가장 먼저 나는 인간들의 제대로 된 ‘비판부재’를 비판해보고 싶다. 작금의 한국사회에는 ‘문제적 상태’들이 많아도 너무 많다. 굳이 구체적인 실례와 관련 인물을 적시하지 않더라도 이 점을 부인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정치도 문제, 경제도 문제, 가정도 문제, 학교도 문제, 알다시피 선박(세월호)도 병원(메르스)도 강물도 공기도 다 문제다. 주변의 인간들을 둘러봐도 문제없는 사람이 거의 없을 지경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문제들에 대한 문제의식이 별로 없는 듯하다. 문제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탓일까? 문제를 문제로서 인식하지를 않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제기도 별로 하지 않는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간다.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러면 문제들은 해소되지 않은 채 또 다른 문제를 낳는 악순환에 빠져든다. 문제제기가 없다는 이것이 가장 큰 문제다. (문제제기가 없는 문제해결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예전에는 그래도 문사철 등 소위 ‘인문학’이라는 것이 그 비판의 역할을 일부 담당해왔는데, 이제는 그나마도 거의 찬밥, 아니 사실상 쉰밥 취급을 당하고 있다. 그러면 신문이나 TV라도 그 역할을 대신해줘야 하는데 요즘은 그것들의 수준도 수준이려니와 젊은 세대들은 그것조차도 아예 보지를 않는다고 한다. 대신에 소위 SNS라는 수상한 공간이 생겨나 슬그머니 그것들을 밀어내고 제대로 된 문제의 지적과 논의 대신 표피적이고 감각적이고 단세포적인, 그리고 때로는 거의 배설적인 비난의 언어들이 횡행하고 있는 모양새다. 그런 종류의 배설적 언어는 결코 비판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다.

감정적인 인신공격도 비판과는 거리가 멀다. 인신공격에는 대개 공격하는 쪽의 오만과 편견이 그리고 증오와 대결의식이 깔려 있다. 그런 것은 결코 미덕이 아니다. 무엇이 문제이고 왜 그것이 문제인지를 합리적으로 검토해 공론화하고 그 해결을 위한 대안을 토론하고 그 구현을 위해 실천적인 노력을 하고 하는 것이 제대로 된 비판인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안에 대한 누군가의 문제제기가 있을 때는 먼저 그 판단의 기준을 들여다보는 것도 중요하다. 그것이 이성인지 정의인지 아니면 이익인지 고집인지를 살펴봐야 하는 것이다. 합리적인 이성 혹은 정의가 기준이라고 저 머리좋은 철학자들이 그토록 강조한 것은 왜였을까? 그 판단의 합리적 기준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의 우리는 너무나 쉽게 진영논리에 기대버린다. 귀 잘린 고흐도 아닌데 다른 소리를 들으려는 귀는 아예 없다. 패거리의 이익이 최우선적인 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럴 때는 하버마스 등이 그토록 강조한 토론과 합의라는 것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오로지 ‘너’와 ‘너희’가 문제고 ‘나’와 ‘우리’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독선적 논리만이 고집스럽게 눈을 부라리는 것이다.

제대로 된 비판을 위해서는 일단 그런 합리성의 소양을 길러야 한다. 인문학이 그것을 길러준다. 인문계 구조조정 어쩌고 하는 서슬 퍼런 칼날을 휘두르기 전에, 전공과 취업의 미스매치를 운운하기 전에, 왜 이런 잘못된 구조가 만들어졌는지 그 연유도 한번 살펴보아야 한다. 모든 문제에는 반드시 그 문제를 야기한 ‘문제적 인간’이 있다. 그것은 관료일 수도 있고 정치가일 수도 있다. 그 책임을 묻는 것도 문제제기의 일환이며 제대로 된 비판의 시작이 된다.

나는 우리 사회가 진정한 선진국이 되기를 바라는 한 사람의 철학자로서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제대로 된, 건전한, 합리적인 비판운동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아주 간절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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