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쁘기만 한 것은 없다
나쁘기만 한 것은 없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1.13 19:01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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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표현을 우리는 자주 쓴다. 이 말이 요즘 사람들에게 어떻게, 어떤 감각으로, 사용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그 옛날 중학생 때 영어를 처음 배우며 ‘in spite of’라는 말을 그렇게 옮기기 시작했다. 그 전 ‘국민학생’ 때는 이런 표현 자체를 거의 듣지 못했다. 그래서 이 말을 처음 듣기 시작하면서 느낀 어떤 이상함이랄까 어색함 같은 감각을 아직도 어렴풋이 떠올린다. 물론 50년 가까이 들어오다 보니 이젠 자연스런 한국어로 받아들여진다.


고등학생 때, 친했던 친구 하나가 제법 어른티를 내면서 내게 말했다. “야, 너 사랑이 뭔지 알아? 사랑은 말이야, ‘because of’가 아니라, ‘in spite of’야.” 나는 그 말이 너무나 멋있게 들려 감동을 받았고 그래서 지금까지도 그걸 기억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사랑’에 대해 강의할 때는 꼭 이 말을 들려주기도 한다.
‘사랑론’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이 말은 그 자체로 분명히 어떤 철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이 말은 본질적으로 ‘비록 A임에도 불구하고 B’라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A는 어떤 나쁜 것이고 B는 어떤 좋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말은 어떤 윤리적 혹은 가치론적 기본공리를 표현한다. (이를 ‘비록의 철학’이라고 불러도 좋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도 ‘그가 너에게 비록 나쁜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하는 것이 좋은 일이다’라는 구조인 것이다.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이 말은 어떤 특유의 도덕적-종교적 힘을 지니게 된다.

각설하고, 이 말이 가진 가치론적 의미를 조금 확장해서 생각해보려 한다. 살다보면 우리의 인생에는, 그리고 이 세상에는, ‘좋지 않은’ ‘옳지 못한’ 심지어는 명백히 ‘나쁜’ 일들, ‘나쁜’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런 ‘나쁜’ 것들이 우리를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는 아마 두말할 필요조차도 없을 것이다. 힘들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나쁜’ 것들을 싫어한다. 그래서 그것을 피하기도 하고 없애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그런 노력이 인생의 중요한 일부가 되기도 한다. 물론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피할 수도 없고 없앨 수도 없는 ‘나쁜 것’ 또한 무수히 많은 게 인생의 이치고 세상의 이치다. 그럴 때는 어째야 하는가. 바로 그럴 때,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가치가 빛을 발한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주문과 같다. 이걸 실제 상황에 적용해보면 그 적용범위랄까 적용사례랄까 하는 것이 엄청나게 넓고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요즘 유행하는 ‘명상’이나 ‘마음 다스리기’ 같은 데서도 아주 유용하다. ‘나쁜 것들’도 유심히 들여다보면, 완전히 100% 전적으로 나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도 어떤 좋은 점, 좋은 면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거기서 어떤 작은 구원이 주어질 수도 있다.

예컨대 ‘비록’ 내 몸이 좀 부실하지만, 비록 내 자식이 좀 못났지만, 비록 내 마누라가 좀 고약하지만, 비록 좀 돈이 없지만, 비록 좀 지위가 낮지만, 비록 좀 유명하지는 않지만,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눈이 잘 안 보이는 대신 귀가 잘 들릴 수 있고, 내 자식이 머리가 나쁜 대신 축구를 잘 할 수 있고, 내 마누라가 성질이 고약한 대신 음식을 기가 막히게 잘 할 수 있고, 돈이 없는 대신 도둑 걱정이 없어 마음이 편할 수 있고, 지위가 낮은 대신 뇌물을 받지 않아 감옥 갈 일이 없고, 유명하지 않아 대낮에 굳이 선글라스를 끼고 다닐 불편이 없고, 마음껏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가 있고 ... 그런 좋은 점들이 없지 않은 것이다. 일일이 모든 경우를 다 나열할 수는 없지만, 찾아보면 좋은 점들 한두 가지는 반드시 찾아질 것이다. 거기서 ‘최악’을 피할 어떤 ‘차선’이 발견될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비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그 길을 열어준다. 어떤 ‘나쁜’ 일들이 내게 닥쳤을 때, 그래서 너무너무 힘들 때, 한번쯤 그런 방향으로 생각을 돌려보기를 모두에게 꼭 권하고 싶다. 거기서 얻어지는 작은 마음의 평화가 어쩌면 이른바 나비효과로 세계평화에 기여할 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근시라 눈이 나쁘다. 먼 데 것이 잘 안 보인다. 그런데 가끔씩 안경을 벗은 채 창가에 서게 된다. 풍경이 마치 수채화처럼 눈에 들어온다. 눈 좋은 사람은 사진처럼 보는데 나는 그림처럼 보는 것이다. 근시효과다. 밤에는 야경이 보인다. 가로등 불빛과 자동차의 움직임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나처럼 눈 나쁜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눈 나쁜 사람들에게는 이 불빛들이 흐리게 퍼져서 마치 불꽃처럼 보인다. 눈꽃 모양의 불꽃처럼 된다. 찬란하기가 그지없다. 자동차의 윤곽은 사라지고 그 불꽃들만 움직인다. 눈이 나쁘다는 생각을 잊고 보면 너무너무 아름다운 풍경이다. 매일 밤이 크리스마스인 것이다. 눈이 좋은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풍경이다.

창가에서 야경을 보다가, 오늘도 나쁜 일들로 힘들어하는 누군가를 위해 이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눈이 나쁜 덕분에 이 한편의 글을 쓸 수 있었다. 나는 눈이 나쁘다. ‘비록’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도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며 글을 쓴다. 이 사실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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