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孤雲)해운(海雲) 최치원(崔致遠)
고운(孤雲)해운(海雲) 최치원(崔致遠)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1.13 19:01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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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실장
 

고운(孤雲)최치원 선생은 경주 서라벌 본피부에서 태어났다. 9세기 신라가 낳은 대문장가인 동시에 뛰어난 사상가로 통한다. 12세 소년이 용감하게 도해(서기 857년 문성왕 19)한지 5년만에 과거에 급제해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에 올랐고 황소의 난을 맞아 병마도통의 종사관이 되어 <토황소격문>을 지어 제시하니 붓 끝이 화살보다 강력함을 나타낸 분이다. 고운. 해운 선생은 해인사의 뛰어난 승려였던 동복형 현준(賢俊)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874년에 예부시랑 배찬이 주관하는 과거인 빈공과에 급제해 관료가 될 자격을 얻고 안휘성 율수현 소속 현위(縣尉)가 되었다. 황소의 난 때 병마도통 고변의 종사관으로서 황소의 난 때 공을 세워 고변의 추천을 받아 도통순관(都統巡官)이 되었고 어대를 하사받았다. 당나라에서 실로 다양한 인사들에게 발송하는 엄청난 표(表)장(壯)서(書)계(啓)격(檄) 등등 매우 다양한 문체로 대작(代作)했다. 고운 선생은 산동성을 거쳐 서기 885년 29세 청년시절 환국했다. 선생이 귀국하자 신라 헌강왕은 시독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서서감지사(侍讀兼 翰林學士 守兵部侍郞 瑞書監知事)에 임명했다. 그러나 이는 제10등급 대내마 이하의 관등자가 임명되는 수병부시랑에 지나지 않았으니 그의 신분이 6두품이었기 때문이다. 왕명을 받아 쌍계사의 진감선사(眞鑑禪師)의 비명(국보). 문경 봉암사의 지증대사(智證大師)의 비명(국보)을 짓고 성주사 낭혜화상의 탑비명 등을 지었다. 890년(진성왕 4)에 대산(태인)태수가 되고 부성(선산)태수가 되었다. 894년 시무책(時務策) 10여조를 올렸으나 채택.실천되지 못하고 아찬(阿湌) 벼슬을 제수받고 뒤에 천령(함양)태수가 됐다. 말년에는 사관(仕官)을 단념하고 전국 각지로 유람하며 방황했다. 의성. 합천.합포.양산.해운대.고령.안동.김해의 청룡대 등지로 다녔다. 904년 해인사의 화엄원에서 법장 화상전을 집필하면서 피병하고 마침내 가야산으로 가족을 데리고 들어간 이후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노상직의 문집. 최선생의 문집 등에 의하면 그가 숲속에 신발을 벗어 놓았다 했으며 세상 사람들이 신선(神仙)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오늘날 전해 오는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20권이 있고 <신당서>에는 최치원의 <四六集>1권과 <桂苑筆耕集> 20권의 책명이 실렸다. 선생은 유학자였지만 불교의 선종과 교종에 대한 깊은 사고가 있었다. 1020년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고 문창후(文昌侯)에 추시(追諡)되었다. 근년에 경기도 하남시에 기념도서관이 건립되고 중국 강소성 양주시에는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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