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도청 선화당을 복원하자
경남도청 선화당을 복원하자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1.20 18:45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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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실장

선화당(宣化堂)은 경남도정의 총본산이고 관찰사(觀察使)가 업무를 보던 정당(正堂)이다. 경남도가 1996년 4월 경남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경남도청 선화당을 복원키로 계획을 세운바 있었고 즉시 복원할 것처럼 보도되었다. 1997년 10월 국립진주박물관이 선화당 터 발굴 작업을 시작해 곧 선화당 기초석을 발굴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위치는 진주성내 북장대 남향 아래쪽 비석군 동편 빈터로 조선시대 병영터 였다.


관찰사 집무실인 선화당은 본래 경상도 우병영으로 군사령부 육상방어기지로 여겨지며 운주헌인데 그 이전에는 관덕정(觀德亭)이었고 진주병사가 담당하다가 경남도 관찰사가 부임하자 선화당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관찰사는 왕을 대리해 치안권. 사법권. 생사권. 징세권. 긴급 명령권 등을 가져 높은 언덕에 솟은 영남포정사 만큼 위세가 당당했다.

경남 관찰사 김사묵. 황철 등은 의병 체포와 자수를 위해 온 힘을 쏟았고 권력 남용으로 이지용은 파면되었고 조모 관찰사는 강제로 축첩하려다 망신당하기도 했다.

선화당은 위세가 대단했지만 30년간 수차례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진주농민항쟁과 동학농민항쟁. 노응규 의병진과 3.1운동 당시 각각 군중들에게 포위되고 공격을 받은 곳으로 유명하다.

1909년 8월경 경남의 최후의 관찰사였던 황철이 통감부의 지방 장관 회의에서 진주에 소재한 도청을 부산으로 이전할 수 있다고 발언했다가 진주주민들에게 선화당이 포위된 일도 있었다.

1910년 10월 9일 선화당 입구에 말을 타고 나타난 경남도장관 가가와는 초대 총독의 무단통치 그대로 헌병경찰제로 폭압정치를 자행했다.

선화당의 정확한 지번은 진주시 남성동 73-10 번지로 영남포정사 바로 안쪽이고 영남포정사와 사거리형태로 긴 단층기와로 일제 강점기의 보통학교 건물의 모습 그대로 흑백사진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일본인 가가와 도 장관은 선화당 주위에 도청 직원들이 거주토록 했다. 이는 겁이 많았던 도 장관이 자신을 지켜 줄 방어망을 구축한 셈이다.

1923년부터 도청이 부산으로 이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진주 사람들은 상경투쟁위원회를 조직해 총독부를 방문하고 1924년에는 서부경남에서도 투쟁을 전개하고 결사대를 조직해 밤낮으로 투쟁하고 기생들도 협력했으나 1925년 4월 부산 부민동에 건립된 2층 붉은 벽돌건물로 이전되고 말았다.

와타(화전순) 경남도 장관이 선화당을 떠날 때 도지사로 변경되었다. 선화당 건물은 용도폐기 되었고 6.25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

경남도 서부청사가 진주로 왔으니 선화당 건물도 복원해 서부경남의 위상을 높이고 도청소재지였음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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