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회(中國社會)의 발전과정(Ⅴ)
중국사회(中國社會)의 발전과정(Ⅴ)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1.31 18:32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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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웅/국립경상대학교 인문대학 명예(강의)교수·한국국제대학교 석좌교수·진주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장·지리산 막걸리학교 교장

지난번에 이어서 ‘중국사회의 발전과정(Ⅴ)’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당(唐)대에서(617) 청말(1911)까지 이르는 이 시대는 경제적으로 균전(均田)제도, 사회적으로 과거제도(科擧制度), 가족적으로 평등분재를 통하여 안정된 질서 속에서 전원과 정부 사이를 배회하며 경독(耕讀)하는 시대를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사(士) · 농(農)이 밀착된 사회인 것이다.

수(隋) 문제(文帝)와 양제(煬帝) 때부터 과거제도를 구상(構想)했던 것이 당(唐) 태종(太宗)에 이르러 종전의 문벌의식을 불식시키기 위하여 <씨족지(氏族志)>를 개편하고 과거제도를 실시하고, 동시에 토지를 공동분배하고 조세를 낮추는 균전제를 실시했다.

문벌의 고하를 막론하고 자유평등의 원칙에서 특히 각지에 분산된 농민의 자제에게 과거의 기회를 주었다.
진사(進士)·명경(明經)·수재(秀才)·명법(明法)·서학(書學)·산학(算學)·개원례(開元禮)·삼전(三傳) · 사과(史科)·동자과(童子科)·도거(道擧) 등 11종으로 나눈 과거는 그 중에서도 기억력에 중점을 두는 명경과 문장력에 중점을 두는 진사에 많이 응모했던바, 공평한 제도에 힘입어 평민 출신을 발탁했다.

청(淸)대 광서 31년까지 1300년의 역사를 지닌 과거는 교육의 목적을 국록(國祿)의 부용(附庸)에 저하시키고, 내용 없는 문사(文辭)에 치중하느라 덕(德)과 체(體)를 소홀히 하게 된 폐단도 있었지만, 농업과 벼슬일을 일체화(一體化)하는 중국사회의 기본관념을 이룩했다.

그러나 과거에 나서는 사람이 순수한 농민뿐 아니라 오히려 장원(莊園)을 지닌 부유층도 끼어 있었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농지는 경작하는 농민이나 벼슬아치·상공(商工)인들에 의하여 점유되어 그들이 벼슬을 그만두었을 때엔 언제고 농촌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한편 분재제도는 진한(秦漢) 때와는 달리 가족끼리의 반목을 지양하는 무형(無形)의 법칙이 되었고, 농촌에 산재하거나, 혹은 농촌에 퇴거(退居)한 서생(書生)들은 의창(義倉)이나 상평창(常平倉) 같은 구제기구를 설치했고, 더러는 사학(社學)이나 서원(書院) 등 교육기구를 설치하기도 했거니와, 종사(宗社)를 건립하여 제사도 집행했으니, 경독(耕讀)사회는 당 · 송을 통하여 안정으로 접어들었다. 중국 사람이 예로부터 다남(多男)을 원한 것은 농민들이 아이를 많이 두게 되면 그중 하나라도 과거에 붙을 수 있다는 소박한 염원의 발로 때문인 것이다.

몽고의 군사관제 하에 있었던 원(元)대에도 과거제도는 존속했고, 더구나 명(明)대에 와서는 당(唐)대를 모방한데다가 수정을 가하여 송(宋)대보다 그 제도가 완비되었다.

동시(童試) · 향시(鄕試) · 회시(會試) · 전시(殿試)의 4단계로 분리 실시된 명대의 과거제도는 각지의 농민 자제에게 보편적으로 그 기회를 주자, 경독사회의 기풍은 더욱 짙어졌고, 청대 또한 비록 만주족과 한족이 대립케 하는 분화(分化) 정책을 썼지만, 사회를 안정시키고 인심을 모으기 위해 여전히 과거를 실시했다.
이러한 역대의 과거제도가 일반 사회에 주는 특색도 다양했다.

첫째, 향촌에 세워진 서당, 비교적 큰 마을에 세워진 사학(社學) 혹은 향학(鄕學), 시·읍에 세워진 학사(學舍) 혹은 경사(經舍), 부(府)나 주현(州縣)에 설립된 공묘(孔廟)의 학궁(學宮), 이 밖에도 각 명승지에 연구기관으로 설립된 서원 등지에서 공부하는 풍토가 조성(造成)됨에 따라 아무리 가난할지라도 향학의 열이 높았으며, 각 종족별로 학전(學田)을 따로 만들어 그 조세로 학비에 충당했다.

둘째, 각종 과거를 통해 같이 등급했던 동방생(同榜生)이나 그 선후배·사제(師弟)들이 무형중 사회의 체제를 조성하여 사회를 지탱하는 세력으로 발전된 사례가 있었다.

셋째, 명(明)대 성화(成化) 때부터 대구법(對句法)에 치중한 문체를 과거의 문장으로 채택한 뒤, 모든 서생이 문장의 사화(詞華)에만 급급하고 실제의 중요한 학문을 돌아보지 않은지라, 학리(學理)에 뛰어난 사람이 급제되지 못할 뿐 아니라, 급제된 관리가 실제에 모자라 자연히 무용한 벼슬아치로 전락되고 말았으니, 그 부작용은 사회와 정치를 불안하게 했다.

넷째, 두뇌를 가진 모든 수재가 과거에만 전념한지라 산업에 역군이 될 상공업계엔 인재 부재의 현상이 일어났고, 설사 경독사회에서 농업에 종사한다 한들, 그 경작 방법이 보수적이어서 새로운 발전을 기할 수 없었다.
더구나 평등분재의 원칙 때문에 모든 토지와 재산이 고루 분산된지라, 재산 정도로 볼 때 거의가 중류였었고, 대부호나 대지주 혹은 영세민이 적어졌다. 이는 곧 중국의 산업이 발달할 수 없는 심각한 원인을 배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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