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국민이 정신 차려야 한다
이제 국민이 정신 차려야 한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1.31 18:32
  • 15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장영주/국학원 상임고문ㆍ한민족 역사문화공원 공원장

 
서기 1637년 1월 30일의 일이다. 16대 근세조선왕 ‘인조 이종’(李悰 재위 1623-1649)과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하급 관리의 푸른 옷을 입고 갇혀 있던 남한산성을 나온다. 그들 부자는 3정승 5판서와 함께 지금의 서울 송파구 석촌 호수 근처인 ‘삼전도 나루터’로 끌려가 청 태종에게 3배 9고두를 하고 눈밭에 꿇어앉는다. 조선조정의 백관들과 백성들은 통곡 한다. 살아 있는 왕, 인조의 항복은 근세조선의 개국 이래 초유의 사태이다.

서기 1636년 12월, 심양에서 불과 10일 만에 한양까지 도달한 12만 명의 청나라 군대에게 남한산성은 겹겹이 포위되고 고립된다. 인조는 전국에 근왕병의 모집을 명하니 조선8도의 감사나 병사가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향한다. 그러나 가까운 강원도, 충청도에서 진군하던 근왕병들은 청나라 군에게 줄줄이 패하여 남한산성근처도 오지 못한 채 와해되거나 후퇴해버린다. 다행이 경상도의 근왕병 4만 여 명이 영남대로를 지나 문경세제, 충주를 넘어 경기도의 ‘쌍령’에 도착한다. 이듬해 1월 2일 ‘쌍령 전투’가 벌어진다. 전투경험이 월등한 청나라의 장군 ‘오곽사’는 우선 3백 명의 기병을 보내 목책을 치고 대기하는 조선군을 교란한다. 조선군은 순식간에 붕괴되고 패주하다가 압사 당했거나 절벽에 떨어져 죽는 장졸이 더 많았다. 조선군 4만 명이 불과 300명의 청군에게 철저히 패망 당한다. 이 전투에서 ’허완‘과 ’민영‘ 두 장군은 장렬히 전사하나 이미 죽음으로도 용서 받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근왕군을 기다릴 형편이 못되자 항복을 결심한 조선의 인조 왕과 청 태종 사이에는 항복 조건과 형식을 논하는 편지가 뻔질나게 오간다. 자존심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청 태종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 된다. “대청국의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는 조선국왕에게 조서를 내려 깨우치게 한다.” 관대하고, 온화하고, 인자롭고, 성스러운 청 태종은 남한산성에 숨어 있는 조선의 인조를 매번 더 무섭게 꾸짖는다. “정묘년의 치욕을 갚겠다면서 왜 섬으로 숨느냐. 짐이 이미 너희 나라를 아우로 대접했는데 너는 더욱 더 배역하여 스스로 원수를 만들어 백성을 도탄에 빠트리고, -중략- 겨우 한 몸이 산성으로 달아나 비록 천년을 산들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인조는 더더욱 공포에 떨면서 답한다. “저희 작은 나라의 백성들의 목숨을 불쌍히 여기시어 저희 작은 나라로 하여금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도모함을 용납하신다면 저희 작은 나라가 마음을 씻어 복종함이 오늘부터 새로이 시작될 것입니다.”

1월 9일 양식을 점검해보니 겨우 일주일 정도 버틸 양인 2,800석만이 남아 있었다. 더욱 급해진 인조는 청 태종에게 ‘“형의 나라로 아우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고 애걸한다. 그러나 배후의 명나라군의 침공이 염려가 된 청 태종은 인조에게 결전을 하자며 더욱 위협을 한다.

이때부터 조선은 아우의 나라에서 신하의 나라가 된다. 항복과정이 마무리가 되어가자 인조는 청 태종에게 간곡하게 물어본다. “항복하면 정말 살려주시는 겁니까.” “엎드려 비오니 저의 피맺힌 정성을 보아서라도 살려 주십시오.” 드디어 항복이 타결 된다.그러한 알량한 편지가 오고가는 27일간 엄동설한의 남한산성에는 이미 얼어 죽고, 굶어 죽고, 홍의포에 터져 죽은 조선의 백성과 군졸들의 시신이 시구문밖으로 가득, 가득 버려진다. 조선의 항복을 받자말자 청 태종은 2월 2일 바람같이 심양으로 돌아간다. 우리의 왕도 백성을 피해 길을 돌아 궁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60만 명의 조선의 백성들은 신분여하를 막론하고 청나라로 끌려갔다. 청나라를 도와 병자호란에 참전한 몽골군에 의해 끌려간 조선인 포로들의 수는 짐작조차 안 되었다. 조선포로 중, 늙은이들은 화살바지가 되었고 젊은 남자들은 노예가 되고, 조선의 여자들은 성노리개가 되었다. 돈을 주고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들을 ‘환향녀(還鄕女)’라고 불렀는데 ‘화냥년’의 유래가 된다. 그녀들은 거의가 동구 밖에서 목메어 자살한다. 조선이 해마다 청나라에 바쳐야 할 조공은 황금 100냥, 백은1,000냥 이외에도 엄청나서 경제는 결딴나 1912년, 청나라가 망할 때까지 계속된다. 당시 700만 명의 조선 인구 중에 180만 명이 죽거나 다친 임진왜란의 참화 뒤 불과 38년 후의 일이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한국사에는 3대 패전이 있다. 모두 세계 전쟁사에 기록될 정도의 비상식적인 패배로 임진왜란의 ‘칠천량 전투’, 병자호란의 ‘쌍령 전투’, 6.25동란의 ‘현리전투’이다. 하나같이 지휘관의 소통부재의 무능과 준비되지 않은 오합지졸의 군대가 보여 줄 수 있는 최대의 비극이었다. 이렇게 반복되는 치욕적인 패배의 더욱 근원적이며 결정적인 원인은 사대주의에 함몰되어 자주국방을 소홀이 한 문약한 조정과 왕, 정부와 지도자의 리더십의 부재이었다. 우리들의 선조들이 겪은 역사로 모두가 내안의 DNA에 기록되어 있다.

작금의 우리의 현실이 당시 조선의 상황보다 그다지 나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남북한은 분단되고, 북한은 핵실험을 계속하며 남한을 협박하지만 주변강대국들 간의 엇박자로 우리로서는 생존을 위한 뾰족한 대책도 없다. 최후의 대비책은 단 한 가지뿐, ‘이제 진실로, 진실로 국민이 정신 차려야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