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은 내가 아니고 내 것이다
내 몸은 내가 아니고 내 것이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2.04 18:32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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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환/창원국학원 부원장

우리는 하루하루를 산다. 그 하루하루가 모여 우리네 인생이 된다. 년 초에 우리가 삶에 대한 보다 깊은 관조의 시간도 가져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본다. 어른의 삶은 우리네 아이들에게는 거울이 되고 삶의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지구촌이 시끌벅적하다. 강대국들은 서로 내가 지구의 지배국, 문명의 종주국이 되어야 한다고 목에 힘을 주고 있고 살기 힘든 나라는 버거운 싸움을 이어간다. 수시로 테러가 일어나고 무고한 지구인들이 쓰러져간다. 우주 밖에서 보면 작고도 작은 이 지구에서 인류라는 이름으로 한 가족으로 오손도손 살면 좋을 텐데 내 말 듣지 않으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한 대 때릴 기세로 부라리고 있는 눈초리를 보면 한심하기까지 한다. 방법은 전혀 없는 것일까. 이대로 가다가는 공룡이 멸절되듯이 우리도 갑자기 사라지지 않을까 무척 염려된다. 공룡은 5천 만 년 전에 완전히 지구에서 사라지기전까지 1억5천만년 동안 지구의 지배 종으로 군림을 하였으나 한순간에 사라졌다. 아마도 지금 인간들처럼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악성 바이러스가 순식간에 번져 그렇게 되었으리라. 결국 조화로움을 상실한 욕심이 그런 파멸을 가져오는 것이다.

삶의 깊은 통찰과 그 통찰이 온 몸에 전율되어 흐를 때 우리는 더욱 사람다운 사람이 된다. 왜 사느냐고 물으면 피식 웃거나 오히려 너는 왜 사느냐고 반문을 하는 것은 삶의 실체가 그만큼 모호하기 때문 아닌가. 흔히들 삶의 실체를 고, 무상, 무아라고 한다. 이건 이해가 된다. 육체적인 몸은 먹이고 닦이고 재워야하며 이걸 반복해야하니 고(苦)이고, 우리와 우리주변을 둘러싼 사람과 환경이 늘 같은 것이 없는 변화 속에 있으니 무상(無常)함이요. 나라고 생각하는 내가 존재할 수 없고 때가 되면 나의 육신은 기, 화, 수, 토로 분리되어 대자연으로 돌아가니 진실로 내 것이라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무아(無我)임이 분명하다.
“내 몸은 내가 아니고 내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여 내 신발은 내가 아니라 내 것이다 라고 하니 잘 알아듣는다. 그럼 내 옷도 내가 아니라 내 것이라는 말도 이해가 되는데 내 몸을 내가 아니라 하니 어리둥절 한다. 우리의 몸은 때가 되면 약해지고 병들며 사라지게 된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무아이며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니 무아이다. 그래서 몸에 지나친 투자는 부질없는 짓이다. 그저 깨끗하게 관리하면 되는 것이다. 이 몸에 붙어있는 명예, 지식, 재물, 계급, 감정 등 모두가 내 것이지 내가 아니다. 내 것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남의 것이 될 수가 있다.

나라고 부르는 나는 진아(眞我)가 있고 가아(假我)가 있다. 진아는 궁극적인 나, 실체적인 나, 본질적인 나이며 가아는 이름, 인격, 성격, 직급, 생김새 등이다. 가아는 끊임없이 변하나 진아는 변하지 않는다. 진아는 가아의 한가운데에 있으면서 가아를 지켜볼 뿐이다. 진아는 가아에 의해 보호받고 빛을 발휘한다. 우리는 평소 가아가 자기라고 단정을 짓고 그렇게 행동한다. 그러다 큰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왕년에 나는 누구이다 라며 주정을 부리며 세상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고래고래 고함을 치는 것이 다 가아의 추태이다. 왕년에 내가 앉아있던 자리에는 이름을 달리하면서 또 다른 사람이 앉아있고, 왕년에 자기가 탓 던 그 좋은 차도 이미 다른 사람이 타고 다니며 자신은 그 자리에서 일어났음에도 과거의 대우를 지금도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은 자기 자신을 뚫어지게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은 공, 사조직의 인사시기이다. 많은 사람들이 퇴직을 하고 진급을 하였으며 자리를 바꾸는 철이다. 전체 자리는 별 변동이 없으나 앉은 사람이 달라졌다. 자기 자리를 자신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은 “내 몸은 내가 아니라 내 것이다” 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내 몸이 내가 아니듯 내 감정도 내가 아니라 내 것이다.내가 내 감정을 가지고 잘 놀 줄 알아야 하는데 감정이 자기를 가지고 노는 사람이 더러 있다. 이른바 ‘갑질’모드에 빠져든다. 그런 사람의 눈은 늘 피곤하며 몸은 지쳐있다. 인간은 감정을 창조하는 위대한 영혼이다. 단순히 감정의 동물이 아니다. 스스로 감정을 창조하는 주체임을 알면 울고 싶을 때 울고 웃고 싶을 때 웃는 자유인이 된다.

고위직일수록 자의든 타의든 카리스마가 증가한다. 그것은 자리가 만드는 허상이다. 사람이든 조직이든 위로 갈수록 맑고 부드러우며 환하고 튼튼해야 생동감이 넘치게 된다. 우리나라가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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