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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강신웅 칼럼
중국사회(中國社會)의 형태(Ⅰ)강신웅/국립경상대학교 인문대학 명예(강의)교수·한국국제대학교 석좌교수·진주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장·지리산 막걸리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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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2.21  18:3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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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는 경제, 문화, 제도에 따른 ‘중국사회의 발전과정’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번 시간에는 중국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중국사회의 형태’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세계 사대문화(四大文化) 발상국이 모두 하류(河流)를 낀 농업국임에 비출 때, 그 중에서 중국은 널따란 황하 유역에 온대란 천연 조건이 더욱 안성맞춤이었다. 농업을 근본으로, 공·상업을 지말(枝末)로 출발한 중국의 농업사는 곧 중국의 경제사임은 고사하고 문화사요, 사상사일 만큼 그 영향은 절대적이다.

중국의 농업은 신농씨(神農氏)에 발단되어서 하우(夏禹) 때에 비로소 문명적인 발달을 꾀하다가 주(周)대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농업 사회를 형성했다. 농경 시대의 전사(前史)는 물론 다른 고대 인류가 그러했던 것처럼 어렵과 유목생활(遊牧生活)이었다. 농업의 시초는 오히려 목축의 필요에 부응한 것이다.

그것은 목축만으로는 증가되는 인구의 수요를 공급할 수 없기에 새로운 생활의 수단으로 경작을 발견했고, 더욱이 현실적으로는 목축에 필요한 목초(牧草)의 공급을 위해 종식(種植)의 방법을 찾았던 것이다. 그 동기는 목초를 쌓아 월동(越冬)하던 곳에 새 풀이 돋아난 것을 보고 그것을 이용하게 된 것이다.

그 증거로 갑골 복사(甲骨卜辭) 가운데 많이 나오는 [전(田)]은 오늘날처럼 곡식을 심는 밭이 아니라 꼴(芻秣)을 심는 밭이었다. 그래서 사냥을 왕왕 [전(田)]이라 한 것은 꼴을 기르는 초원(草原)에서 사냥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복사(卜辭)를 통해 본 은실(殷室)의 제왕에게 [관서(觀黍)]와 [성전(省田)]의 기록이 보였고, 《주역(周易)》에는 경종(耕種)의 문례가 보임과 동시에 신농씨의 농기구 발명설을 말하고 있다.

이 밖에도 신농씨 때 경작을 시작했고 농구도 제작했다는 기록이 많이 있으니, 신농씨를 중국 농업의 창시자로 인정하기에 부자연스럽지 않다.

더구나 신농씨 말기엔 중국이 신석기 시대에 진입한지라 당시를 중국의 농업 발단기로 추정할 수 있거니와 하북(河北) 북국에서 출토된 신석기 시대의 ‘돌쟁기’로 입증할 수 있다. 당뇨(唐堯) 때 제정된 역법(曆法)으로 백성에게 농시(農時)를 따라 경작케 했고, 하우(夏禹)의 치수(治水)로 농업은 한걸음 과학화했다.
그러나 진정한 농업의 발전은 위수(渭水) 유역에서 발전한 주(周)대에 이르러 이룩되었다.

공전(公田) 제도의 실시와 때를 같이하여 동(銅)제 농기구의 개발은 농경 발전에 박차를 가해 드디어는 천경(淺耕)에서 심경(深耕), 우경(耦耕)에서 우경(牛耕) 등의 현저한 경작 방법의 개량을 가져오기도 했다.

한편 봉건제도를 실시한 주조(周朝)는 농업을 중시한 나머지 주왕(周王)이 손수 밭갈이 시범을 보이는가 하면, 농업을 전담하는 관리로 [후왕(候王)], [후백(候伯)], [후아(候亞)], [후려(候旅)] 등을 《시경(詩經)》에서 찾아볼 수 있다.

춘추전국 때의 관중(管仲)·상앙(商鞅)·한비(韓非) 등은 모두 농업을 부국의 생업으로 보아 적극 장려한 나머지 철기(鐵器)의 농구도 개발되었거니와 수리(水利)도 좋았다. 특히 농사철을 빼앗지 말도록 배려한 정책의 밑받침과 시비(施肥)의 기술적 향상은 중국에 있어 농업의 지위를 공고히 한 것이다. 중농억상(重農抑商) 정책으로 농업을 가장 장려했던 것은 한 대(漢代)이다. 한 문제(漢文帝)가 ‘농천하지대본야(農天下之大本也)’라고 조서(詔書)를 내리고, 경제(景帝) 때에는 황제가 친히 밭갈이에 참여한 것은 중국에서 사상 처음으로 농민의 지위를 끌어올린 선언이었고, 동시에 농업의 중요성을 인식시켰던 것이다.

한편 원제(元帝) 때에는 모든 관리가 백성에게 부당한 방법으로 농사를 방해 말도록 명령으로 저지했으며, 농관(農官)을 파견하여 농사를 감독하고 권장케 했으니, 정부의 이 같은 배려는 그 유례를 찾기에 힘든 것이다.
수·당(隋唐) 이후에도 농민을 위한 정책이나 토지제도의 변혁이 있었지만, 이러한 정치적인 인소(因素)는 오히려 경제 파탄을 초래한 예가 중국에는 비일비재하다. 구태여 당(唐)·송(宋)·명(明)·청(淸)의 예를 들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역대를 두고 통병(通病)으로 등장하고 있는 요역(徭役)·폭정·가렴주구(苛斂誅求)·조령모개(朝令暮改) 등이 농민을 기아에 몰아넣든지 아니면 현격한 빈부의 차를 조성케 한 것이다.

중농정책의 영향으로 농민이 안거낙업(安居樂業)했다는 한(漢)대의 농민 생활상에서 보면 부자는 논이 두렁을 연이었지만, 빈민에게는 송곳 하나 세울 땅이 없다고 빈부의 차를 지적했으며, 다섯 식구에 100무(畝)의 땅으로 100석(石)을 수확한다 하지만, 10분의 5의 세금을 제하면, 결국 50석에 불과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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