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소비
지식의 소비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3.06 18:31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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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최근 한 가까운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지식인 중 하나로 손꼽히는 모 명사가 모 최고명문대학에 초청되어 강연을 했는데 학생들이 영 집중을 하지 않고 분위기가 어수선해 엄청나게 자존심 상해하더라는 것이다. 그 친구는 그 명사와 아주 가까운 사이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유명한 그 분이 그렇게 유명한 그 대학에서 한 강연이 그럴 지경이라면 이 사실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현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


우리가 대학생이었던 1970년대만 하더라도 그런 자리라면 아마 호기심 때문에라도 분위기는 진지했을 것이다. 나만 하더라도 대학시절 양주동 선생의 강연을 흥미진진하게 들었던 기억이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런데 지금 그게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그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건 단순히 그 양반의 강연 수준이나 그 대학 학생들의 수준과는 별개로, 우리 시대의 ‘지식’이, 그 ‘지식의 소비자’가, 그 지식과 소비의 양태가 크게 변화하고 있다는 한 증거가 아닐까? 한때 유행했던 무슨 ‘파워 시프트’처럼 일종의 ‘날리지 시프트’(지식 이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그 순간 그 친구의 눈빛이 반짝 하고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그렇다. 나는 여러 경로에서 그것을 몸으로 느끼고 있다. 우리 세대가 경모해 마지않았던 저 인문학적-사회과학적 지식들이 지금 거의 세상의 시선에서 비껴나 있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내가 전공하는 철학이 대표적인 사례다. 요즘 누가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에, 아우구스티누스-토마스에, 베이컨-데카르트에, 칸트-헤겔에, 무엇보다 그들의 주제에 관심을 기울이는가. 80년대의 지식계를 휩쓸었던 저 프랑크푸르트학파도, 90년대를 장악했던 저 포스트구조주의도 지금은 거의 존재감이 없다. 그것을 전공한 이들의 소규모 그룹에서, ‘그들만의 잔치’로, 마치 찻잔 속의 태풍처럼 간신히 그 명맥을 유지할 따름이다. 내가 전공한 하이데거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하기야 나만 해도 속속 발간되고 있는 하이데거전집의 새로운 내용들에 대해 솔직히 그다지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으니, 뭐 탓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그 지식들이 채우고 있던 그 자리를 지금은 무엇이 메꾸고 있는 것일까. 모 포털의 이른바 ‘지식인’ 사이트가 상징하듯이 지극히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생활주변 지식들이 그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물론 이른바 ‘베스트셀러’라는 형태로 전통적 서적들이 소비되고 있기는 하나 그 내용들을 들여다보면 실망과 배신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 태반이다. ‘인간’과 ‘세계’, 그리고 ‘삶’의 수준을 끌어올려줄 진지한 지식들은 찾아보기가 결코 쉽지 않다. 많은 것들이 표피적이고 아무래도 좋고 심지어 천박하기까지 하다. 이른바 SNS라는 세계에 떠돌아다니는 지식들이 그렇다. 지식 자체는 물론, 지식 소비자도, 그 소비의 양태도, 목적도 다 변한 것이다.

물론 그런 캐주얼한 지식의 예찬론자도 적지 않다. 그 뿌리는 아마 저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른바 ‘거대담론 내지 거대 이야기의 부정’에까지 닿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솔직히 좀 걱정이다. 이런 식으로 흘러간다면 앞으로 인간들은 도대체 어떤 모습이 될 것이며 세상은 도대체 어떤 모습으로 변할 것인가. ‘발전’이라는 말은 터무니없다. 그것은 일종의 사탕발림이다. 지금 지식소비자들은 알게 모르게, 더러는 광고에 넘어가, 더러는 재미에 낚여, 혹은 자본의 마수에 걸려, 천박화의 지하계단을 내려가고 있다.

지식의 한 특수형태인 ‘이야기’의 세계도 사정은 비슷하다. 그 대표적 양식이었던 ‘소설’은 지금 급격히 ‘영화’나 ‘드라마’라는 형태로 변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컨텐츠다. 그 질이 담보되지 않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천문학적인 돈을 처들이는 할리우드의 영화들 중에, 그리고 이른바 천만 관객을 동원한 방화들 중에, 시청률 높은 드라마들(특히 악마적인 막장드라마들) 중에, 깊은 감동으로 길이 남을 이야기들이 도대체 몇 편이나 되는가. 두 번 세 번 거듭해서 보고 싶은 그런 ‘작품’들이 도대체 어디 있는가. 기술과 자극이 그리고 인기가 ‘질’과 ‘수준’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나는 20세기의 지적 토양에서 자라난 한 그루의 나무로서 내 나름의 광합성을 하면서 푸른 잎을 키우고 산소를 뿜어낸다. 하지만 그 산소로서 사람들의 영혼을 정화시키기에는 이 시대의 대기가 너무 탁하다. 천박한 지식의 미세먼지가 너무나 자욱한 것이다. 그래서 소비자들의 눈에 나의 지식이 가닿지를 않는다.
물론 1970년대의 지성이 지금 그대로 통할 수는 없다. 지식은 그 소비자들을 고려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형태를 모색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결코 그 질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재미있게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그러나 넓이가 있고 깊이가 있는, 감동이 있고 배움이 있는 그런 지식들을 우리는 개발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지식들이 재대로 개발되어 지식 시장에 유통되고 진열되고 소비된다면, 아마 그 명사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던 그 명문대학의 학생들도 흥미를 갖고 그리고 나름의 지적 풍요를 얻게 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책이든 기사든, 강의든 강연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그 형태는 물론 많을수록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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