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으로부터의 자유
폭력으로부터의 자유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3.08 19:21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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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소설가

‘폭력으로부터의 자유’는 크리슈나무르티의 책 제목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여기서 나는 나의 폭력성을 말하고 싶고 그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어릴 때부터 싸움질을 잘했다. 그래서는 어머니까지 싸우게 만드는 아주 난폭하고 별난 아이였다. 이것은 엄살도 아니고 구라도 아니다. 내가 이 나이에 그 따위 해서 뭐하겠는가. 다만 때꼭때꼭 사람을 때리는 못된 성질머리를 가지고 있는 나처럼 못난 사람이 있다면 함께 생각하면서 함께 사람다운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서 새롭게 살아보자는 뜻이다, 폼나게 말이다.


얼핏 보면 싸움질에서 남을 때려서 피를 내서라도 이기고 사는 게 ‘까리쓰마’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칫 한 방에 훅가는 게 그런 삶이다. 한 동네에서도 가만 살펴보면 맨날 술이나 마시며 잘났다고 큰소리 탱탱 치며 싸움질하던 사람의 말로는 여지없이 비참하다. 남에게 바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꿍꿍 일만하는 사람은 그래도 말년에 밥술깨나 먹으며 따뜻하게 산다. 물론 대다수 우리 서민들의 사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극소수 재벌이나 권력자들은 또 그들 나름의 징한 삶의 방식이 있겠지만 그건 또 다른 문제로 다르게 논의돼야 할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맞은 상처의 기억은 평생 간다. 사람이 맞는다는 건 그 아픔보다는 그 모욕감과 공포감이 작용하기 때문에 그렇게 오래 기억될 것이다. 그 기억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상처를 더 깊게 하기도 하고 왜곡하기도 한다. 그래서 맞고 자란 사람은 그 자식을 때리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말을 흔히 한다. 부모가 욕을 하는 걸 듣고 자란 아이는 욕을 보다 익숙하게 할 것이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맞는 걸 보고 자란 아들은 아내를 때리기 십상이라는 말도 있다.

몇 년 전에 남동생이 늦은 결혼을 했다. 경남이 고향이다보니 나는 경기도에 살지만 아직 다른 형제자매들은 경남에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다. 남동생의 결혼식은 그런데도 서울에서 있었다. 그 남동생과 올케의 직장이 서울이고 결혼 후엔 서울에 살 것이라 그렇게 된 모양이다. 그런데 경기도에 살고 있는 나만 쏙 빼고 결혼 소식을 아무도 전해주지 않았다. 정말이지 거의 일 년이 지나도록 까맣게 몰랐다. 동생의 결혼식이 있고 일년이 지난 쯤에 여동생이 와서 얘기를 해주어서 알게됐다. 그때의 황당함이라니!

처음엔 내 위 맏언니가 야속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요양원에 계시니 집안의 대소사는 맏언니가 치뤄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맏언니에게 전화로 따졌더니 동생들이 하지 말자고 해서, 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나 빼고 나머지 형제자매 다섯 명이 하나 같이 다른 형제자매에게 책임을 돌렸다. 미안하다고 사과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나름 분석한 결론은 바로 밑의 동생의 계략이었다. 이 동생은 자산가다. 부잣집 맏이에게 시집을 가서 재산을 차지한 경우인데 졸부라는 이름 이하도 이상도 아니다. 그 동생은 평소에 나에 대해 라이벌 의식이 있다.

그래도 그렇지 동생의 결혼식에 나만 따돌리다니, 고민은 계속됐다. 요 근래에야 그 중요한 결론을 얻었다. 나는 그 부자가 된 여동생을 오래 전에 아주 심하게 때린 적이 있었던 것이다. 또 결혼을 한 그 동생도 불과 몇 년 전에 아주 난폭한 폭언을 퍼부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폭력은 이처럼 배신을 낳는다. 그 외에 다른 좋지 않은 작용을 할 수도 있지만 폭력을 당한 사람은 그 가해자에 복수를 하거나 최소한 배신을 한다는 걸 인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을 위해서 때렸다는 것은 참으로 지독한 결과를 가져오는 독선이었던 것이다.

어렸을 때는 동생들을 때렸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그다지 자주 때린 건 아닌 것 같다. 기억하기로는 한 두 번?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이미 관계는 파토가 났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 후부터는 마음이 얼마쯤 가벼워졌다. 그 전에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고 어떻게든 그들을 골려주어 고통을 주어 복수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쯤, 배신당해도 싸다, 싸! 나 자신을 책할 뿐이다. 그리고 내가 부모가 됐을 때는 두 자식을 때렸다. 그 둘이 청소년기를 벗어나면서 나는 때리는 것은 사람의 할 짓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고 이후 속죄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돌봐왔다. 다행히도 둘은 무사히 성장해주었다. 아직 그 상처들이 다 아물진 않았겠지만 남은 여생을 그 상처를 치유해주기를 기원하며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겠다고 결의할 뿐이다.

내 성질이 폭력적이고 난폭하고 거칠다는 걸 인정하고 그건 사람을 크게 다치게 하고 결국은 나에게 돌아온다는 걸 깨닫고 그런 성질머리를 딱 끊고부터 내 인생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 더러운 폭력을 딱 끊은지 만 삼년, 이웃에 도와주는 사람이 줄을 잇고 버는 돈은 새는 데 없이 차곡차곡 쌓이던 것이다. 날이 새기가 무섭게 새벽부터 무언가 나를 주기 위해 이웃들이 들락거린다. 오늘도 미처 먹지 못한 김치가 너무 곰삭아 곤내가 나고 냉장고가 비좁아 아깝지만 다 버렸다. 지난 가을에 김장을 일부러 안 했는데도 이렇다. 그 뿐인가 작은 다세대 주택이긴 하지만 우리 가족 소유로 집이 세 채다. 이웃집 복덕방 아저씨가 싸게 난 집을 자꾸 권하는 바람에 사게 된 건데 그러느라 빚이 조금 있지만 자족하자면 부자가 된 것 아닌가! 진정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사람인 게 감사하고 사람은 다만 사랑할 줄 아는 게 진정 사람이라는 걸 알아서 거듭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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