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움에 대하여
부러움에 대하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3.27 19:16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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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오랜만에 옛 대학친구들이 다시 모였다. 한 친구가 어떤 검사를 해봤더니 자신은 행복도가 100%로 나왔다고 은근히 자랑했다. 다른 한 친구가 그 친구에게 ‘부럽다’고 했다. 둘 다 할 만큼 하면서 성공적으로 살아온 친구다. 문득 궁금해졌다. ‘부럽다’고 한 친구는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일까.


일반인들은 아마 잘 모르겠지만 철학에는 ‘기준’에 관한 논의가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저 비엔나 학단의 논리실증주의가 전개했다. 즉 진정한 과학과 사이비 과학의 구획기준은 무엇인가 하는 논의다. 그들은 이른바 ‘검증가능성’을 그 기준으로 제시했다. 원칙적으로 검증가능한 것은 ‘과학’이고 검증 불가능한 것은 ‘사이비과학’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컨대 영혼의 불멸이나 신의 존재 같은 것을 논하는 이른바 형이상학은 검증불가능한 것을 다루므로 그들에게는 사이비과학으로 치부되었다. 이런 입장에 대해 칼 포퍼가 제기한 반론도 있지만 골치 아프고 딱딱할 수도 있으니 자세한 것은 생략한다.

중요한 것은, 그 ‘기준’이라는 것이 그만큼 대단한 철학적 주제라는 것이다. 하기야 생각해보라. 우리가 옷 하나를 고를 때도 각자 나름의 기준이 있다. 식당에서 메뉴를 고를 때도 기준이 있다. 집을 살 때도 당연히 기준이 있다. 누구는 색, 누구는 크기, 또 누구는 맛, 누구는 영양, 그리고 누구는 남향, 누구는 전망 기타 등등. 결혼을 할 때도 예컨대 외모, 인품, 성격, 집안, 능력 등등이 기준으로 작용하고, 입학이나 취직 같은 경우는 이것이 더욱 엄격해진다. 인간들의 어떠한 선택, 어떠한 판단에도 ‘기준’이 작용한다. 이것이 결국은 ‘좋고 나쁨’을 판가름한다. 때로는 이것이 인생과 역사의 방향을 결정짓기도 한다. 그래서 그 기준은 객관적이고 엄정하고 그리고 타당한 근거를 지녀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 기준이 주관적인 경우도 당연히 있다. ‘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나 ‘제 눈에 안경’이라는 속담도 아마 ‘주관적 기준’이 작용하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겠다. 이 경우 그 기준은 그 사람의 ‘가치관’이 된다.)

사실 정답은 없다. 기준이 객관적이어야 할 경우도 있고 주관적일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채점이나 평가를 할 경우라면 객관적이어야 하고 문화를 즐기는 경우라면 주관적이어도 좋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혹은 기관의 장을 선거할 경우라면 철저하게 객관적이고 타당한 기준이 있어야만 한다. 또 여행을 할 경우라면 이 기준이 주관적이고 다양할수록 오히려 더 바람직할 수도 있다. ‘기준’은 그렇게 우리네 생활의 곳곳에서 실제로 작용하고 있다.

그때 그 기준은 무엇보다도 ‘구체적’이어야 한다. 그 사람의 ‘무엇’이 부럽냐는 것이다. 저 ‘부러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부러움이라는 현상은 물론 ‘내가 갖지 못한 무언가 좋은 것을 그/그녀가 갖고 있을 때 생기는 것’이지만,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여기에도 각자 나름의 구체적인 기준이 작용함을 알 수가 있다. 예컨대 우리는 그/그녀의 잘생긴 외모를, 그의 인기를, 그의 지위를, 혹은 권력을, 재력을, 재주를 ... 부러워한다. 우리가 부러워할만한 일들, 부러워할만한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 아니 온 세상에 널려 있다. 그런 부러움은 때로 ‘비교’로 이어져 시기와 질투를 낳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이 자신을, 혹은 그/그녀를, 혹은 양자 모두를 괴롭히고 상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문제로 이어지는 부러움은 대체로 그 가치판단의 기준이 자신이 아닌 바깥에, 남에게, 타인에게 있다. 특히나 자기 능력의 바깥에 있다. 어떻게 보면 ‘남’이 나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철학에서는 ‘어리석음’이라고 일컫는다. ‘참된 진실’을 모르고서 자신을 괴롭히니 어리석음인 것이다. 따라서 그 ‘참된 진실’을 알고 자신의 무겁고 불편하고 괴로운 마음을 놓아주는 것은 ‘지혜’가 된다. (물론 타인을 기준으로 삼아 모자라는 자신을 채찍질하여 향상을 도모하는 것은 더욱 지혜며, 자신을 위해서나 세상을 위해서나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문제가 되는 것은 다만 자신을 괴롭히고 타인에게 해약을 끼치는 그런 경우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도 내 머리를 스쳐갔다. 누군가를 부러워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일부를 그 사람의 전체로 잘못 판단하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 (논리학에서는 그런 것을 부당주연의 오류, 혹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도 부른다.) 부분이 전체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완벽하게 모든 것이 부럽기만 한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아무리 부러운 그도 그녀도 절대 부러울 수 없는 힘든 부분은 반드시 있다. 다만 그것이 우리에게 보이지 않을 뿐이다. 아무리 못난 나에게도 그에게도 남이 부러워할 부분이 하나둘은 반드시 존재한다. 다만 그것이 나에게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아무리 잘난 대통령도 재벌총수도 나만 못한 부분이 반드시 있다.

그래서 나는 행복도 100%라고 자랑하는 친구가 부럽다고 한 그 친구에게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그는 지금 여러 가지 사정으로 좀 힘들어한다.) “누군가를 부러워하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미래를, 그의 전체를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라고. 그 친구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 나는 이런 말로 그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위로받고 편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적어도 행복의 기준은 남에게 있지 않고 내 안에 있다. 마음에 있다. 이 글이 지금 남과의 비교로 힘들어하는 당신에게도 그 극복을 위한 하나의 단초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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