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삼토(一飯三吐) 일목삼착(一沐三捉)
일반삼토(一飯三吐) 일목삼착(一沐三捉)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3.28 18:52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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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중국의 역사소설 ‘초한지(楚漢志)’에는 주인공 두 사람이 나오는데 한 사람은 유방이고, 한 사람은 항우이다. 유방에게는 장량, 소하, 진형, 한신 등 믿고 맡길 수 있는 부하가 있었다. 유방과 그의 부하들의 만남은 말 그대로 운명이었다. 죽음을 불사할 각오를 한 깊은 만남이었다. 반면 항우는 혼자였다. 책사(策士) 범증(范增)마저 버렸으니 그에게는 사람이 없었다. 역사는 유방에게 한나라를 세우는 임무를 주었고, 항우는 비참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초한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사람이다. 정도를 지키고 인심을 얻은 유방을 도와주는 사람은 많았고, 정도를 저버린 항우를 도와주는 사람은 적었다. 즉 ‘초한지’는 도와주는 사람이 많은 장군이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전쟁에서 이기는 법을 제시하고 있다. 유방 혼자서는 항우를 이길 수 없는 것이다. 이를 정리해 보면 이렇다. ‘천하를 얻으려면 먼저 사람을 얻어라.’이다. 성공한 사람은 주변에 자신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뛰어난 사람을 두고 있다. 즉, ‘사람경영’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혼자서 ‘북치고 장구 친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다. 조그만 업적은 가능할지 몰라도 ‘위대한 성공, 위대한 역사’는 불가능하다.


위대한 역사를 전개한 세종대왕과 현 시대에 위대한 역사를 쓰고 있는 빌 게이츠에게는 뚜렷한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사람이다. 이 위대한 역사적 인물은 ‘사람경영’으로 시공을 초월해서 조우하고 있다.

추운 겨울 늦은 밤, 집현전 숙직실에 등불이 켜져 있었다. 숙직실에서 신숙주가 책일 읽고 있었던 것이다. 삼경(三更)을 지나 사경(四更)이 지나도록 불은 꺼지지 않았다. 그때까지 세종 또한 잠을 자지 않았다. 이윽고 새벽을 알리는 닭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그때서야 불이 꺼졌다. 세종은 입고 있던 초구(貂裘:수달의 가죽으로 만든 두루마기)를 벗어 잠든 신숙주의 몸에 덮어주고 비로소 침전으로 들어갔다. 아침에 눈을 뜬 신숙주는 임금의 두루마기가 자기 몸에 덮여 있는 것을 보고 속에서 우러나오는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이 일화와 관련해서 조선의 하늘을 바꾼 천문학자 이순지, 조선 고유의 음악을 만든 박연, 천재 과학자 장영실과 정초 등 한 시대를 풍미한 학자들이 세종대왕 시절에 쏟아져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님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마이크로소프트사에는 ‘캔디데이트 제너레이터’라는 인재전담팀이 있다. 약300명으로 구성된 이들이 세계 각지의 인재를 거둬들이고 있다. 마이크로소트사의 인재 중 70%이상이 이곳을 통해 영입되고 있다고 한다.

사마천이 남긴 ‘사기(史記)’에 보면 공자는 주(周)나라 주공(周公)을 극찬하였다. 주공은 사람을 무척 아꼈다. 자신을 찾아온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한 끼 밥을 먹는 중에도 세 번씩이나 밥을 뱉어내고 손님을 맞으러 달려 나가는(일반삼토)가 하면, 머리를 감는 사이에도 손님이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세 번씩이나 젖은 머리채를 움켜쥐고 나갔다(일목삼착)는 고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주공은 3000년 전 ‘사람경영’의 원조인 셈이다.

‘사람경영’의 핵심은 성숙한 인재와의 만남이다. 만남은 운명이다. 누구를 만나는가는 운명에 달려 있다. 군사적 천하통일의 주역인 한신은 원래 항우의 부하였다. 한신이 왜 항우를 버리고 유방을 택했을까? 만남의 깊이가 달랐기 때문이다. 천하를 놓고 만남의 깊이가 승자와 패자를 갈랐던 것이다.

‘역경(易經)’의 64괘 중 여덟 번째 괘(卦)인 비괘(否卦)에는 왕을 보필하는 것을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원영정(元永貞)이다. ‘원(元)’은 크다는 뜻이다. 사람이 크고 작은 것은 책임감에서 비롯된다. 큰 사람이라는 것은 그가 얼마나 책임감을 갖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된다. ‘영(永)’은 변하지 않고 오래가는 것이다. 오래도록 지속하면 허물이 없다고 비괘는 설명하고 있다. ‘정(貞)’은 올바른 원칙이다. 이익 앞에 의(義)를 저버리는 세태에서 이는 인물을 판단하는 중요한 포인트이다.

정치인들 입만 열면 새 세상을 열겠네, 백성을 위하네 하지만 철저히 제 이익을 노릴 뿐, 민생문제는 뒤로 제쳐두고 밥그릇 싸움만 하고 있으니 이런 사람들을 한 입으로 두 말을 해 대는 양설거사(兩舌居士)라고 했던가? 돈 좀 벌고 권력을 좀 쥐었다 하면 사람을 경시하는 요즘 세태에 경종을 울리는 교훈이 아닌가. 사람을 잘 골라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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