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움에 대하여
아까움에 대하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4.13 22:26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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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요즘 대학원에서 공자의 철학을 강의하고 있는데, ‘학이’편에 나오는 ‘절용이애인’(節用而愛人)이라는 말에서 원생들과 한참 토론을 하게 되었다. 글자 그대로 직역하자면 ‘아껴서(혹은 알맞게) 쓰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어려운 말은 한 마디도 없고 따라서 이 뜻을 모를 사람도 아무도 없다. 그런데 그런 뻔한 소리를 공자는 왜 한 것일까. 공자라는 사람은 사유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행위적으로나 정말 엄청난 사람이어서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는 삶과 세상에 대한 절절한 통찰이 묻어 있다. 잘난 척 그냥 해보는 말이 절대로 아닌 것이다. 나의 입장은 그가 한 말의 현학적 문구해석이 아니라 그 밑바닥에 숨은 깊은 철학적 의미를 ‘뒤집어’ 읽어보는 것이기에 나는 이 말을 최대한 ‘해석학적’으로 새겨보았다. 그의 문제지평과 해석자인 나의 문제지평을 견주어 보아 그 지평의 일치 내지 융합, 즉 철학적 의미에서의 ‘이해’를 시도한 것이다. 그 결론은 대략 이런 것이다.


그의 이 말에는 ‘아껴서(혹은 알맞게) 쓰지 않고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현실 내지 세태, 그것에 대한 우려 내지 비판 그리고 그 해결 내지 개선의 지향이 깔려 있다. (특히 그는 ‘나라를 다스리는(道...國)’ 맥락에서 이 이야기를 한다) 이런 문제는 2500년 전의 중국 노나라나 지금의 한국이나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인간세상의 보편적 문제라는 뜻이다. 아껴서(혹은 알맞게) 쓴다 그렇지 않다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물건 물자 돈 등에 대해 적용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이를 테면 시간에 대해서도 기회에 대해서도 능력에 대해서도 이것은 문제가 되고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에 대해서도 문제가 된다. 좀 확대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바로 뒤에 ‘이애인’(그리고 사람을 사랑하라)이라는 말이 계속되는 걸 보면 공자가 ‘사람’에 대해서 이 말을 했다고 해석하더라도 전혀 엉뚱한 해석은 아닐 것이다. 사람을 아껴서(혹은 알맞게) 쓰지 않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연결되는 것이다. 그렇다. 한 번 생각해보자.

주변을 둘러보면 사람을(특히 그 사람의 능력과 노력을) 전혀 아껴서 (소중히) 쓰지 않고 아깝게 낭비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이 눈에 띈다. 아예 개무시하고 쓰지 않거나 아무렇게나 함부로 써버리는 경우가 많아도 너무 많다. 인재가 적재적소에 (알맞게) 배치되지 않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대규모의 청년실업사태는 그 극치다.

생각해보라. 얼마나 아까운 노릇인가. 한사람의 인재가 그런 인재로 자라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인재란, 본인과 그 가족이 엄청난 물적 심적 노력을 투자해 죽을힘을 다해 도달한 지점인 것이다. ‘한 사람의 인재가 자라기 위해 최소한 30년의 세월이 걸린다’는 말도 있다. 과장이 아니다. 누군가는 60년이 걸려 겨우 어떤 경지에 올라선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전혀 그런 것을 알아주지 않고 써주지도 않는다. 거기에 사람에 대한 ‘사랑’ 같은 것은 있을 리도 없다.

벌써 좀 전이지만 내 후배 중 하나가 스스로 세상을 등진 일이 있다. 아무도 그를 알아주지 않았다. 살기가 힘들었다. 그는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인재였고 유럽의 학문을 우리나라에 소개하는 대단히 우수한 연구와 번역 등을 잇달아 세상에 내놓았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그가 기울인 노력은 얼마만한 것이었을까. 충분히 짐작이 간다. 그것이 깡그리 사라져 버린 것이다. 누군가가 그의 그 수준에 도달해 다시 그만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또 다시 최소한 30년을 투자해야 한다.

또 다른 내 지인은 미국에서 그리고 홍콩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평가받던 학자인데, 스스로 그 평가를 뒤로하고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무도 그의 그 능력을 알아주지 않았다. 그는 지금 강원도에 칩거하며 이 한심한 사회에서 고개를 돌리고 있다. 얼마나 아까운 노릇인가. 이 거대한 낭비! 이것이 우리 사회의 엄연한 현실이다.

그 모든 것을 알아주고 적절히 써주고 하더라도 어차피 우리는 늙어 자리를 떠나야 하고 그 능력을 고이 접어야 한다. 더러 은퇴 후에도 그것을 발휘할 기회가 있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죽음으로써 그 모든 것을 반납하게 된다. 모든 것이 000 즉 원점으로 리셋되고 마는 것이다. 너무너무 아깝다.

나 자신도 요즘 그런 것을 피부로 느낀다. 한 30년 학교에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가르치고 하다 보니 어느새 제법 아는 것도 많아졌다. 제법 재미있는 수업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별로 이것을 알아주는 사람은 없다. 그간의 노력과 그 결과가 좀 아깝다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다. 주변에도 그런 비슷한 경우가 하나둘이 아니다. 공자도 필시 이와 똑같은 것을 느꼈을 것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그래도 별로 섭섭하거나 화가 나지는 않는다. 다만 좀 안타까울 뿐이다. 아깝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공자도 아마 그래서 저 한 마디를 더 남겼을 것이다.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나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냐! 그저 이 말을 조촐한 위안으로 삼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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