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전'의 진정한 유래
'좌전'의 진정한 유래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1.11.29 18: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신웅/한국국제대학교 석좌교수
지리산막걸리 학교 교장
‘좌전’의 전칭은 ‘춘추좌씨전’이다. ‘한서’의 ‘예문지’에 “춘추의 고경(古經)12편, 좌씨전 30권”이라고 실려 있고 원주에 “좌구명은 노의 태사(사관)”라고 하였다.

‘좌전’의 저록은 이것이 처음이다. ‘예문지’에 기록된 유흠의 칠략문에 말하기를 “중니가 노의 사관이 법도가 있다고 하고 좌구명과 함께 그 역사기록을 보면서 칭찬하거나 또는 나쁘게 평언하는 것을 글로 나타내지 않고 제자들에게 구수(口授)하였더니 제자들이 물러나서 각기 전하는 말을 달리 하였다.

좌구명은 제자들이 저마다의 이해에 머물러서 공자의 말씀의 진의가 잃어질까 염려한 나머지 본래의 사적을 논하고 아울러 전(傳)을 지어 공자가 공언(空言)으로써 경(經)을 가르친 것이 아님을 증명하였다”고 하였다.

이 보다 앞선 언급으로는 ‘사기’의 ‘십이제후연표’에 말하기를 “공자는 서(西)로 주왕실의 성쇠의 자취를 살피고 역사기록과 구문을 논하매 노를 기점으로 하여 차례로 ‘춘추’를 지었다. 70제자들이 그 내용을 입으로 전수하게 된 것은 사적에 관한 칭찬과 비난 등 역사적 평가를 글로 나타낼 수 없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의 군자 좌구명이 제자들이 저마다 이해를 달리하고 각자의 이해에 만족하여 공자의 말씀의 참된 모습을 잃게 될까 염려하고 공자의 ‘춘추’에 의거해서 그 말씀을 자세히 논하여 ‘좌씨춘추’를 완성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의거한다면 ‘좌전’은 공자의 ‘춘추’를 주석하기 위해 지은 것이며 ‘춘추’와 비슷한 시기에 책으로 된 것이 명백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 대에 있어서의 ‘좌전’의 전습과정을 고찰하여 본다면 이에 의심이 없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서한(西漢)일대의 경학자들은 일찍이 이 책이 ‘춘추’경과 어떤 관계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책을 크게 떠받들어 위세를 떨치게 한 것은 실로 유흠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한서’의 ‘유흠전’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유흠이 나라의 비장도서를 교정하다가 고문 ‘춘추좌씨전’을 발견하고 크게 기뻐하였다.

처음에는 ‘좌씨전’이 고자, 고어가 많아서 학자들은 자구의 해석에 종사할 따름이었으나 흠이 ‘좌씨전’을 다루데 되자 ‘전’의 글을 인용하여 ‘경’을 해석하여 적이 새로 발명하는 바 많았다. 흠은 생각하기를 좌구명은 사물에 대한 호오(好惡)의 감정이 공자와 같고 친히 공자를 보았으며 공양씨와 곡량씨는 70제자 이후의 사람이니 친히 본 것과 전문한 것과는 상세하고 소략함이 동일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흠은 이 책에 더욱 친구해지면서 ‘좌씨춘추’와 ‘모시(毛詩)’·‘일례’· ‘고문상서’의 전적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할 생각으로 모두 학관에서 정식으로 다루게 하고 애제가 흠으로 하여금 오경박사와 더불어 강론케 하니 제 박사가(흠이 태상(太常)의 박사들에게 공분으로 책망하기를 “‘춘추좌씨’는 좌구명이 수찬한 것으로서 비부에 깊이 소장되어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 지금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고문헌을 수집, 교합, 편집하는 직책을 지닌 사람들이 문헌을 오래 내버려두면 없어지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다만 구전하는 설만 믿고 전래된 기록을 저버리는 것은 바로 말사(末師)들(공양씨·곡량씨)을 좇는 것이요, 결코 옛 것으로 돌아가서 고문헌을 밝히려는 태도가 아니다.

또한 남아 있는 문헌의 단편을 완고하게 지키려고만 하고 새로운 기록에 의해서 시정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의(私意)만있지 선과 의에 복종하는 공정심이 없고, 현행하는 ‘상서’가 완편이라고 고집하며 좌씨가 ‘춘추’를 전한 일이 없다고 주장하니 진실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하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