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줌에 대하여
알아줌에 대하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4.21 18:50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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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공자가 한 말 중에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라는 것이 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이야기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제대로 아는 걸까? 그의 다른 말들이 거의 다 그렇듯이 이 말의 진정한 철학적 의미를 제대로 새겨보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말 자체야 무엇 하나 어려운 것이 없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나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냐!” 그런 뜻이다. 군자란 설명하자면 길어지지만 일단 ‘제대로 훌륭한 사람’ 정도로 정리해두자. 이건 인간에 대한 공자의 이상이었고 지향점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이런 군자가 되기를 그는 희망했고 권고했다. 그런데 내가 늘 강조해서 하는 말이지만, (이 말을 뒤집어 읽어보면) 그가 그토록 이 말을 거듭 강조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만큼 세상에 군자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사람이 그런 ‘제대로 훌륭한 사람’인가. 공자의 요구사항은 이것저것 많다. 논어의 이곳저곳에 나오는 말들이 다 어떤 식으로든 그 요구사항 내지 조건들인 셈이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말, 즉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나지 않는 것’이다. (‘不亦’(또한...아니냐)이란 말이 바로 이것이 그 조건 중의 하나임을 지시한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보자. 공자는 왜 이것을 군자의 조건으로 제시한 것일까. 나에게는 그의 안타까운 마음이 훤히 보인다. 그는 아마도,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화난다는 사람, 화를 내는 사람, 그런 사람을 여럿 보았을 것이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이 넘쳐난다. 지금이라고 다를 바가 있을까? 천만에. 공자 때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할 것이 없다. 길거리에서 남이 무시하는 표정으로 자기를 쳐다봤다고 화를 못 참아 주먹질을 하고 칼부림을 하고 심지어 불을 지르는 사람들도 드물지 않다. 요즘 뉴스의 단골메뉴가 되는 이른바 보복운전도 넓게 보면 다 그런 부류다. 저 여의도의 정치하는 분들도 다 그 ‘而慍’(화난다)의 모범사례다. 이른바 정치보복은 그 전형 중의 하나다. 공자는 그런 한심한 행태를 군자가 지양해야 할 악덕의 하나로 꼽는 것이다. 물론, 보통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공자의 이런 기준은 좀 지나치게 높을 수도 있다.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화나는 것이(최소한 섭섭한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 그건 그렇다.

하지만 이 말속에는 하나의 숨은 뜻이 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그 기준을 ‘남’에게 두지 말고, 나 자신 혹은 객관적인 그 무엇에다 두라는 공자의 권고인 것이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도 같은 부류다. 재미삼아 좀 속된 표현을 쓰자면 ‘쪼대로’ ‘꿋꿋이’ 그런 정신이 군자에게는 필요한 것이다. 거기엔 자기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전제가 된다. 그럴 때는 ‘남의 평가’ ‘남의 알아줌’ 여부에 좌우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화날 여지도 없는 것이다. 화는커녕 소신을 위해 실제 목숨까지 걸었던 소크라테스, 보에티우스, 모어, 뵈메 등이 다 그런 존재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정점에 있다.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제대로 훌륭함’이라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진지하게 고려해볼 인물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공자의 이 말에는 또한 이런 사정도 숨어 있다. 즉 사람이 사람을 알아주지 않는 안타까움이 현실 속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나는 ‘아까움’이라는 주제로 논한 적이 있다. 알아줄 만한 사람을 알아주지 않는 이 사회적 현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거의 보편적이다. 공자의 노나라도 우리의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공자는 그것이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오죽하면 그는 이런 말을 제자들에게 남겼을까. 공자씩이나 되는 사람도 남들은 그다지 ‘알아주지’ 않았다. 이 시대의 수많은 인재들도 남들은 ‘알아주지’ 않는다. 무시하고 흉도 보고 방해도 하고 심지어 해코지도 한다. 공자와 문맥은 좀 다를지 몰라도 나는 이 ‘알아줌’이라는 것도 하나의 도덕적 가치로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싶다.

알아준다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삶의 맥락에서 관계를 갖게 되는 ‘상대방’을 즉 타자를 내 행동의 내부에서 ‘고려’ 혹은 ‘배려’한다는 것이다. 거기엔 타자에 대한 근본적인 ‘존중’이 깔려 있다. 그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 그의 상황 내지 사정을 들여다보는 것, 그의 능력을 들여다보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아픔을 들여다보는 것, 그것이 곧 ‘알아줌’에 다름 아닌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나의 ‘도덕’으로 체화한다면, ‘화나는’ 일이 원천적으로 있을 수 없고, 나아가서는 온갖 다툼과 사건도 일어날 수 없다.

지금 우리에게는 이런 도덕에 대한 연습이 너무나 안 되어 있다. 모든 인간들의 가슴 속에는 오로지 ‘나’만, ‘나의 이익’만 있지, ‘남’의 존재는 아예 들어갈 틈도 없는 것 같다. ‘알아줌’이라는 꽃이 피어날 토양이 아예 없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도 우리의 세상도 삭막할 수밖에 없다.

‘알아줌’이라는 이 꽃을 우리는 어떻게 다시 사람들의 내면에 피워낼 수 있을까. 부모가 자식을 알아주고, 자식이 부모를 알아주고, 친구가 친구를 알아주고, 선생이 제자를, 제자가 선생을, 아내가 남편을, 남편이 아내를, 사장이 사원을, 사원이 사장을, 권력자가 국민을 국민이 권력자를, 소비자가 판매자 생산자를, 생산자 판매자가 소비자를... 그렇게 서로 알아주는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일까.

나 또한 이런 세상을 꿈꾸면서 오늘도 자판을 두드려본다. 함께 깃발을 들어줄 이 시대의 공자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런 사람이 너무 그리운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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