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지, 대사교를 복원하자
대사지, 대사교를 복원하자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4.27 18:39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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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실장
 

대사지(大寺池)대사교(大寺橋)는 진주중안(현 진주초등학교)앞과 진주경찰서에서 진주성 방향으로 큰 절이 있었다는 뜻이고 인공 연못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연못 양편에서 중앙 쪽에는 목재 다리로 4~5개가 지탱하고 흙으로 바닥을 덮은 형식을 취하여 대사교(大寺橋)위로 사람과 자전거가 왕래할 정도였다.

진주성 남쪽은 남강이 요새역할을 하지만 북쪽에는 바로 성과 연결되므로 방어를 위해 연못 즉 해자(垓字)가 필요했다.

임진왜란 이후 적을 방어할 필요성이 급했기 때문에 연못을 만들고 그 위에 목책 다리를 세웠는데 광해군 때 진주병사 남이흥과 진주감사 박경신 등이 앞장서서 땅을 파서 대사지의 깊이와 넓이를 조정, 확장했다.

전설에 의하면 음력 정월 대보름이 되면 진주성 내외에 사는 사람들이 대사교 양편에 모여 1년간 재앙이 없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고 서로 오가며 다리 밟기 행사를 진행했다고 전해 온다.

대안동 기생조합 기생들도 동참해 다리 밟기를 했는데 기생들 끼리 손을 잡고 금년에도 액운이 없기를 기원하고 새신랑이 나타나 엎고 가기를 소원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 소문을 듣고 서울, 경기도 청년들이 진주 기생들을 찾아 남향하고 대사교 다리 밟기 운동에 동참하고 인연을 맺었다고 전해 온다.

상봉동, 옥봉동에 사는 부인들은 남편의 바람기를 막아 주기를 소원하기도 했고 공부하는 아들, 딸의 성공을 기도하기도 했다.

1910년 이후 일제 당국은 영교 즉 사까에바시라고 호칭했고 조선 사람들은 대사교(大寺橋)라고 불렀다.

약 4백년간 존속했다는 대사지와 대사교가 일제 침략하에서 매립, 파괴, 훼철되었으므로 그것을 복원하게 되면 우리의 문화애국정신을 고양시키는 큰 계기가 될 것이다.

흙으로 만들고 목책 다리를 건설함으로 영구적 시설을 세운다면 큰 비용 없이 가능한 일이다. 그 당시 사진이 남아 있으므로 복원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본다.

수년전 진주신문사에서 대사교. 대사지 복원을 위해 노력한 사실이 있고 진주시에서도 복원할 계획이기 때문에 옛 사진을 참고해 복원한다면 금상첨화가 될 일이다.

너무 초라하거나 옛 모습을 갖추지 못한 어슬픈 복원은 두고두고 손가락질 대상이 될 것이기 때문에 제대로된 복원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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