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선생 배다리건설은 대박
정약용 선생 배다리건설은 대박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5.11 18:42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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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실장
 

정약용(丁若鏞)선생은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丁載遠)과 윤선도의 손녀 슬하의 4남 2녀중 넷째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한강의 상류 광주로 풍광이 빼어난 곳이다. 정약용 선생은 어려서부터 똑똑하고 영리해 인근에 소문이 자자했다. 4세, 5세 때 천자문, 명심보감을 외웠고 10세 때 자작시를 모아 삼미집(三眉集)을 지었다.


정약용(1762~1836년)선생은 자가 미용(美鏞), 공보(公輔), 호는 다산(茶山)이며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18세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조선 최대의 실학자로 알려져 있고 곧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주장했다.

정약용 선생을 상기하면 약 18년간 귀양살이한 것이 부각된다. 유배생활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유배의 고난 때문에 최고, 최대의 학자가 되는 밑거름이 되었고 많은 저술을 남길 수 있었다.

1783년 과거급제, 1789년 식년문과 급제, 1801년 신유박해로 장기로 유배생활을 하고 1808년 전남 강진군으로 긴 세월 유배생활이 시작됐다.

1792년 수찬으로서 축성법을 세워 성제와 기중가설을 지어 수원성을 완성했다.

1795년 정조대왕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사도세자의 묘소가 있는 화성을 다녀 올 때 당시 왕은 2천여 명의 문·무관 호위군, 기타 남, 녀를 거느리고 한강을 건너게 되는데 배다리(舟橋)공사를 계획하고 건설을 주도한 분이 정약용 선생이다.

주교(舟橋)는 가로 4m. 세로 10m 크기로 나눗 배 36척을 연결해 옆구리를 쇠사슬로 연결하고 강을 가로 지르고 배위에 나무 판자로 연결하고 난간의 위험을 방지하는 1.3m 높이의 안전대를 설치했다.

수년 전에 양평시 세미울 남강변 양수리 두물머리에 먼저 건설했고 정선생의 본가인 남양주시는 뒤이어 능내리에 세웠다.

입장료 1인당 4000원, 어린이. 청소년은 2000원, 단체객은 할인해 준다.

정약용 선생의 진주방문은 적어도 3번~5번 이었고 거주기간도 3년이 넘을 것으로 짐작된다.

1781년 장인 홍화보(洪和輔)가 경상우병사로 재임중 촉석루를 중수했던 시기에 진주에 머물고 1791년 부친 정재원이 진주 목사로 재임중 거주했을 것으로 본다. 현 촉석루에 정약용 선생의 글이 새겨져 있다.

그렇다면 정약용 선생은 촉석루와 남강에서 아이디어를 얻고 4년 후 정조대왕이 안전하게 한강을 건너게 실시.실천했으니 한강 배다리 건설 당시 36척 배를 연결했음이 확실하다. 1914년 5월 16일 개통한 남강 배다리는 22척 나눗 배를 연결하는 공사를 일본인이 감독했으나 사실은 정약용 선생의 배다리에서 출발한 일이다.

안동에 월영교, 의령에는 구름다리, 진주에도 구름, 배다리를 설치한다면 대박이다. 정약용 선생의 배다리가 사천, 산청, 하동, 함양, 합천, 거창, 진주 등지에 가장 먼저 건설하는 쪽이 우선권이 있고 대박날 일이다. 관광객 대박은 엉뚱하게 배다리에서 시작될 수도 있음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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