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그 아름다운 기술
용서, 그 아름다운 기술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1.12.01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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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숙/진해 중앙초등학교 특수교사
경남학교도서관연구회 회원
2008년부터 시작된 학교도서관연구회 산하 독서치료 모임, 2011년 11월 18일 DR. Fred Luskin의 '용서(Forgive for Good)'를 읽었다. 3년 넘게 이어온 모임을 통해 알게 된 '몸에 밴 어린시절'과 '아직도 가야할 길', '따귀 맞은 영혼',  '있는 그대로', '화의 심리학', '부모와 아이 사이' 등 그 동안 읽었던 책들과 나를 알아가는 뼈아픈 시간들이 이 책을 만나기 위한 것이었을까. 2004년 발행되어 지금은 절판된 이 책에서 나는 3년이 넘게 매달려온 치유와 평화의 체험을 하였다.

이 책은 용서를 배우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들과 용서의 의미, 용서의 기술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용서란 기술이고 이러한 기술을 우리는 배우고 익힐 수 있으며, 상호관계에서의 용서는 자기 자신의 용서로 확대될 수 있음을 설득하고 있다.

용서가 일어나기 전의 마음 상태를 공중선회만 계속하는 끌탕 비행기에 비유하면서 이 끌탕 비행기를 착륙시키는 기술로 용서를 권한다. 이러한 끌탕 비행기의 마음 상태가 되는 이유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거나 원하지 않는 것을 얻는 데서 찾고 이러한 상태가 되면 우리는 이러한 끌탕 비행기가 되는 이유를 지나치게 개인적인 일로 받아들이고 내 마음 속 공간을 그 끌탕 비행기에게 너무 많이 주며, 누군가를 탓하는 탓 돌리기 게임에 빠져 만나는 사람들을 질리게 하는 원망 넋두리를 늘어놓게 된다고 한다.

이러한 끌탕 비행기의 마음 상태에서 어떻게 용서가 가능하다는 것일까? DR. Fred Luskin은 먼저 실현 불가능한 규칙을 고집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보길 권한다. 즉,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거나 원하지 않는 것을 얻는 것은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많고 인생은 그렇게 공평하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끌탕 비행기가 된 이유가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개인적인 면과 비개인적인 면의 통찰 부족으로 보고 있다. 또한 과거의 울화에 현재 내 마음 속 공간을 너무 많이 허용하고, 내 감정의 주인을 남에게 주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DR. Fred Luskin는 용서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발생한 일에 대한 나의 느낌을 정확하게 알고, 상대방의 어떤 행동이 나에게 상처를 냈는지 분명히 의식하며, 나의 체험을 최소한 한두 명의 믿을 만한 친지와 얘기해볼 것 등을 필수적인 세 가지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용서를 평화의 느낌이라고 정의한 DR. Fred Luskin은 어떤 마음의 상처가 자기하고만 관계된 문제가 아님을 인식하기 시작할 때, 자기 느낌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려고 마음먹을 때, 지나온 이야기를 하면서 피해자가 아니라 씩씩한 주인으로 지신을 그려낼 수 있을 때 우리 마음 안에 들어서는 평화로움이 ?용서?라고 했다. 그래서 DR. Fred Luskin은 용서, 그 선택의 유익함을 용서학을 연구하면서 얻은 깨달음과 북아일랜드 HOPE 프로젝트 등의 과학적이고 의학적인 결과를 통해 보여주고 있고, 진정한 용서가 아닌 것, 용서를 방해하는 장애물도 제시하고 있다. 책의 마지막에는 용서의 구체적인 기술로 긍정적인 기분을 되찾는 테크닉(PERT: Positive Emotion Refocusing Technique)과 완전히 용서하기(HEAL: Hope, Education, Affirmation, Long-Term Commitment), 나 자신을 용서하는 법 등이 소개되어 있다.

위의 DR. Fred Luskin의 용서에 기술에 맞춰 영화 밀양을 해석해볼까. 먼저 남편을 잃은 상처를 지닌 전도연은 이미 끌탕 비행기가 되어 밀양에 도착한다. 그래서 송강호를 만나 그가 보이는 친절이나 호의도 알아보지 못한다. 남편과 아이와 함께 오랫동안 행복하기를 원했으나 전도연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원하지 않는 아이의 유괴와 죽음이라는 것을 밀양에서 얻었다. 즉 원하는 것은 얻지 못했고, 원하지 않는 것은 얻었다. 전도연은 남편의 죽음과 아이의 유괴와 죽음이라는 현실을 지나치게 개인적인 일로 받아들인다. 살면서 남편이 죽는 부인은 얼마나 많으며, 매우 슬프고 비극적인 일이지만 아이를 나의 소유물이 아니라 독립된 인격체로 보았을 때 언젠가는 부모와 분리되어야 할 존재로 본다면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절규하기 전에 아이와 죽지 않고 혹은 분리되지 않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야 된다는 비현실적인 규칙을 생각해볼 수 있다. 또한 새로운 밀양이라는 무대는 용서를 위해 전도연이 자신의 체험을 최소한 한두 명의 믿을 만한 친지와 얘기해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또한  DR. Fred Luskin이 제시한 것처럼 유괴범을 용서하는 것을 용서로 착각한 전도연은 신앙의 가르침 때문에 의무적으로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용서받았다는 유괴범의 진술에서 용서당한 그 때부터 자기는 아무 권리도 주장할 수 없게 될까봐 용서를 못하고 돌아온다. 이러한 전도연의 잘못 배운 용서의 기술에는 자신을 용서하는 기술도 부재한다. 자기용서가 필요한 경우로  DR. Fred Luskin는 인생의 결정적인 과제를 수행하는 데 실패한 사실 때문에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 자신이나 남에게 적절한 도움을 주지 않은 일로 마음이 불편한 사람, 남을 상처 입힌 일로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 자기 파괴적인 성향 때문에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는 사람 등이 있다. 주인공 전도연은 남편과 아이라는 인생의 결정적인 관계를 상실한 자신, 아이의 유괴와 살해를 막지 못한 자신, 자신의 돈에 대한 과시가 혹 아이를 유괴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죄책감, 아빠를 잃은 아이를 친구도 없는 밀양이라는 낯선 곳으로 데리고 온 것에 대한 미안함 등이 혼재하는 자신을 먼저 용서하고 경험한 s일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노력하고, 자기 느낌을 종교의 힘이 아닌 스스로 다스리며, 좋은 취지를 견지하면서 자기 인생을 이야기하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용서를 읽으면서 나는 얼마나 많은 실현 불가능한 규칙을 고집하고 있는지 돌아본다. 나는 행복해야 한다. 나는 사랑받아야 한다. 내일 날씨는 덜 추워야 한다. 내일 출근길은 원활해야 한다. 나는  DR. Fred Luskin의 용서를 완벽하게 이해해야 한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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