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순왕 어진 봉행 경천묘 향례 명맥 이어가야 합니다
경순왕 어진 봉행 경천묘 향례 명맥 이어가야 합니다
  • 한송학·사진/이용규기자·참고=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승인 2016.05.15 18:05
  •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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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4대째 경천묘 관리하고 있는 김우용 내임.

하동군 청암면 경천묘는 1902년 신라의 마지막 왕인 제56대 경순왕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 건립됐다. 현재의 위치에는 1988년 하동호 건설로 이전하게 됐다. 특히 이 경천묘 관리는 조상 대대로 경순왕의 후손들이 이어오고 있으며 현재 4대째 경천묘를 관리하고 있는 김우용(85)씨가 경천묘를 관리하는 내임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김우용 내임은 "왕을 모시는 것을 어릴때부터 지켜봐 왔는데 앞으로도 문중을 비롯한 지역의 유림들과 협조를 해 관리해야 한다"면서 “조상을 모시는 것이 보람된 것이 누군가는 당연히 모셔야 하는 것을 제가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내임은 또 "젊은 세대들은 경순왕이 어떤 왕인지 모르는 것이 가장 아쉽다. 죽어서도 백성을 사랑한 임금이 경순왕"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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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마지막 왕 제56대 경순왕 어진 봉안 
경천묘 경순왕 후손들 4대째 관리 이어와
‘경남도 문화재’ 지정…역사 자료로 중요
매년 음력  2월·8월 중정일 경천묘 향례 
향례 등 의식 관리 필요…행정 도움 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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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천묘에 경순왕 어진 봉안
경천묘(敬天廟)는 1902년(고종 3) 지방 유림과 후손들이 발의하여 경순왕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원래 하동군 청암면 중이리 신기마을에 위치했는데, 하동·사천 지구 농업용수 개발 사업을 위해 하동호를 건설하게 되면서 수몰 지역이 되어 1988년 11월 20일 현재의 위치로 이건했다.

대유학자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과 수은 김충한, 양촌(陽村) 권근(權近.1352~1409)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금남사(錦南祠)는, 원주 용화산 고자암 경천묘에서 성심으로 경순왕의 어진을 모신 이색과 권근의 성의에 보답하고 그 큰 뜻을 받들고자 1918년 지역 유림이 논의하여 건립했다. 김충한은 고려 말엽의 충신으로, 조선 개국에 불복하고 두문동에 들어간 절의에 감복하여 배향하게 됐다.

경천묘는 하동 경천묘 경순왕 어진(河東敬天廟敬順王御眞)이 봉안된 경모당(景慕堂)과 이색, 김충한, 권근의 위패가 봉안된 금남사, 그리고 관리사 및 출입문인 읍양문(揖讓門)과 홍살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천묘는 내삼문(內三門) 안쪽 담장으로 구획되어 있어 별도의 묘우 영역을 가진다. 경천묘를 묘우 영역만으로 지칭할 수도 있으나, 넓은 의미로는 전체를 가리킨다.

▲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 어진에 대한 향례가 지난 3월 26일 오전 10시 하동군 청암면 평촌리 소재 경천묘에서 봉행했다.

경천묘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한옥이다. 겹처마로 활주를 설치하였으며, 내·외부는 단청이 되어 있다. 일반 사가의 사당과 다르게 경순왕의 어진을 봉안한 사당으로 격식을 높였으며, 대들보의 용머리 장식과 봉황, 연꽃 장식 등이 위용을 보인다. 용은 지기(地氣)와 호법신의 상징이며, 또한 왕의 상징이기도 하다. 내부 어진을 봉안한 감실을 별도로 설치하였으며, 감실 장식에도 거북이, 연꽃 봉오리 등을 썼다. 영각 주변에는 경주 숭혜전(崇惠殿)에서 어진을 이곳으로 옮길 때 사용되었던 악기와 기물들이 보관되어 있다.

▲ 하동군 청암면 평촌리 경천묘 전경.

◆경천묘 관리는 경순왕 후손들 명맥 이어와
경천묘는 지금은 김우용 내임이 관리하고 있다. 1985년 11월 14일 경남도 문화재 자료 제133호로 지정됐으며 매년 음력 2월 중정일(中丁日)과 8월 중정일에 향사를 받들고 있다. 하동 경천묘 경순왕 어진은 현재 경남도 유형 문화재 제474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천묘 뒤편은 대나무밭으로 조성되어 아늑한 분위기이며, 경천묘 앞으로 하동호에서 내려오는 수로가 형성되어 있다.

경천묘는 원래 쌍계사(雙磎寺)에 있던 경순왕 어진을 나라에 품신하여 받들고자 하였던 유학자들의 정성과 숨결이 담긴 곳이다. 당시 어려운 여건으로 경주 숭혜전으로 잠시 옮길 수밖에 없던 상항이었으나, 남도의 유생들이 함께 힘을 모아 지리산 기슭에 묘우를 세우고 나라에 건의함으로써 경순왕 어진을 경천묘에 봉안할 수 있었다.

 

◆경순왕은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은 신라 제56대 왕(재위, 927~935)으로서 성은 김(金), 이름은 부(傅)이며 후대에 마을공동체 신으로 추앙됐다고 전해지고 있다. 경순왕은 927년 후백제 견훤의 신라 침공으로 경애왕이 사망한 뒤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르긴 했으나 이미 후백제의 침략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영토는 날로 줄어 왕경을 제외한 국토 대부분을 잃었다. 이에 따라 더 이상 국가재정을 지탱할 길이 막힌 데다 민심마저 떠난 최악의 상황이었다. 또한 935년에는 후백제의 왕인 견훤이 장남 신검(神劍)을 비롯한 형제들에 의해 유폐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금산(金山)의 불사(佛寺)에 유폐된 견훤은 3개월 뒤 탈출하여 고려로 망명한다. 이렇듯 신라를 둘러싼 정세가 더 이상 고려의 보호국 처지에서 나라를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내몰리게 되자 경순왕은 935년 고려에 귀부(歸附)한다. 고려 태조는 유화정책을 펴 경순왕에게 유화궁(柳花宮)과 경주를 식읍으로 하사하고 정승공(政丞公)에 봉하였다. 신라의 마지막왕이자 고려 초의 문신으로 살다가 978년에 일생을 마쳤다. 능은 경기도 연천군에 있으며 1975년 6월25일에 ‘사적 제244호’로 지정됐다.

역사적 인물이 신격화되는 중요한 동인(動因)은 뛰어난 재주가 있거나 비극적 사건의 희생자라는 요건 등을 지녀야 한다. 경순왕은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한 비운의 왕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신격으로 추앙받게 하는 계기가 된다. 즉 비극적 삶에 대한 연민이 신격화에 크게 작용한 것이다.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하자 고려 태조는 경순왕을 우대한다. 장녀 낙랑공주를 경순왕의 아내로 삼게 하고, 경주를 식읍으로 하사하면서 정승공에 봉하여 위계(位階)를 태자 위에 놓이게 하는 등 대우를 해 준다.

개경에 도착한 경순왕은 고려 태조에게 칭신(稱臣)하겠다는 글을 보내게 되고, 태조가 일단 물리쳤으나, 고려의 신하들은 “하늘에 두 해가 없고, 땅에 두 임금이 없다”고 하면서 경순왕의 요청을 받아들일 것을 간청하여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고려 태조가 특별대우를 해 주긴 했지만 일국의 왕으로서 삶과 신하로서의 삶은 비교할 수 없는 급격한 신분 변동임이 틀림없다. 경순왕이 귀부하기 위해 개경으로 가는 광경을 고려사(高麗史)에서 묘사하고 있다.

 

◆경순왕 어진 면류관·홀 잘 표현 특징
경천묘 경순왕 어진의 제작 시기는 불명확하나 세밀한 필치와 음영이 표현된 채색 등의 묘사 방식과 화풍으로 보아 1677년(숙종 3) 직후에 개모(改摸)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개모된 어진은 소실되었고, 하동 경천묘 경순왕 어진은 19세기에 한 번 더 개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순왕 어진은 정면을 바라보는 반신상이다. 경순왕은 임금이 쓰는 면류관(冕旒冠)에 신하의 예를 갖출 때 사용하는 홀(笏)을 양손에 쥐고 있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 면류관의 사각형 안에는 붉은색과 흰색의 원 2개가 있으며, 관의 양끝에 붉은색, 노란색, 푸른색, 녹색의 구슬이 달려 있다. 얼굴은 분홍빛 살구색이고, 눈썹·콧수염·턱수염은 가는 선으로 그렸다. 옷은 붉은색이며, 소맷부리와 도련에 녹색의 이색선(異色?)을 덧대었고, 끝단에 금색 이색선을 덧댄 형태이다.

특히 초상화에 그려진 경순왕의 모순된 모습은 신라의 마지막 임금이기는 하지만 고려 태조 왕건에게 귀부(歸附)하여 신하의 예를 취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독특한 형태야말로 이 그림의 특징이다.

현재 어진의 윗부분이 습기로 손상되었고, 인물 주위는 물감 때문에 생긴 얼룩이 있으나 전체적인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역사 인물의 초상화에 나오는 인물의 상반된 삶을 단적으로 투영하기 쉽지 않은데, 하동 경천묘 경순왕 어진에는 면류관과 홀이 잘 표현되어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봄·가을 두차례 향례 거행
경천묘는 음력 2월 중정일(中丁日)과 8월 중정일 향례가 거행된다.
최근에는 지난 3월 26일 오전 10시 식이 봉행됐다. 문중과 지역유림이 주관하는 향례는 서울, 경기, 강원 등 전국의 경순왕 후손과 문중 유림 등 100여명이 참석한다. 식은 폐백, 초헌례, 아헌례, 종헌례, 음복례, 망요례 순으로 진행된다. 경천묘 향례 이후에는 경천묘 우측의 금남사(錦南祠)에서 향례가 거행됐다. 금남사는 목은 이색 선생의 초상과 위패, 양촌 권근 선생과 수은 김충한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곳으로, 문화재자료 제134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경천묘 관리 지자체 도움 절실
과거에는 경천묘의 관리자가 4명이나 됐다. 문중에서 지역 유림에서 많은 관심을 갖고 있을때였다. 하지만 현재에는 1명의 내임(內任)이 관리하고 있다. 김우용 내임은 30년째 경천묘를 관리하고 있다. 아니 그 이전부터 관리해 왔을 수도 있다. 김 내임의 할아버지때부터 경천묘를 4대째 관리해 왔으니 항상 곁에서 지켜봐 온 것이다. 하지만 김 내임은 앞으로가 걱정이라고 한다. 경천묘를 관리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타 지자체처럼 행정에서 경천묘를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요청하고 있다. 물론 경남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어 관리를 하지만 향례 등 역사와 전통적인 부분도 행정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 내임은 "점점 관심이 줄어들고 있는데 앞으로 관리할 사람이 없을 것 같다. 앞으로 개인이 관리하기는 힘들다. 국가에서 향례 등의 의식도 관리해야 하는 바람이 있다. 개인은 한계가 있다. 유교사상이 쇠약해지고 유림들도 발을 떼고 젊은이들도 외면하고 자연히 소멸되어 가고 있는데 국가에서 관심을 갖고 보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내임은 또 "저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고 그래서 제가하고 있다. 조상을 모시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특히 김우용 내임은 앞으로의 바람에 대해 "요즘 세대들이 경순왕에 대해 잘 모르는데 아쉽다. 살아서도 백성을 우선 생각했고, 죽어서도 용이 되어 백성을 보살피겠고 했는데 그만큼 백성을 사랑한 임금이다"고 말했다. 글/한송학·사진/이용규기자·참고=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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