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정체에 대하여
사람의 정체에 대하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5.19 18:43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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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논어 위정편에 보면 “視其所以 觀其所由 察其所安. 人焉廋哉! 人焉廋哉!(시기소이 관기소유 찰기소안 인언수재 인언수재)”(2-10)라는 말이 있다.


“한 사람의 행위를 보고, 그 동기를 살피고, 그가 만족하는 바를 관찰하면 그의 사람됨을 어찌 감추겠는가. 그의 사람됨을 어찌 감추겠는가?”라는 번역도 있고 “그가 하는 바를 보고 그 동기를 살피며 그가 흡족히 여기는 바를 관찰하면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숨길 수 있겠느냐!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숨길 수 있겠느냐!”라는 번역도 있다. 각각 훌륭한 이해와 고심의 결과이나 완벽한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일단 이 말을 “그 ‘어떻게’를 보고, 그 ‘어째서’를 보고, 그 ‘무엇에서’를 살펴보라. 사람이 어찌 숨길 수 있겠는가!” 쯤으로 번역해 둔다. 어차피 2500년을 뛰어넘는 번역이 완벽할 수는 없다. 약간의 파격이라면 파격이겠다.

중요한 것은 이 말의 본질적인 취지다. 나는 공자라는 사람을 엄청 높이 평가하고 그리고 좋아한다. 철학의 본령인 ‘사람’에 대해, ‘세상’에 대해, 공자만큼 훌륭한 통찰과 고민과 노력을 (그리고 멋있는 언어를) 보여준 이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그렇게 흔하지 않다.

그의 이 말은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는가. 기본적으로는 ‘人’(인)과 ‘廋’(수) 즉 사람과 감춤이다. 이는 사람의 정체가 보통 교묘히 숨겨져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현상을 바탕에 깔고 있다. 표리부동, 인면수심, 교언영색 ... 다 관련된 이야기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그럴듯한 가면 뒤에 숨기고 있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이야기다. 사람의 자기은닉 정체은닉은 거의 보편적인 현상? 혹은 본질적인 현상?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사실 자기조차도 자기를 잘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좀 확대해석하자면 불교의 무아론-무명론과 프로이트의 무의식도 이런 자기은닉과 깊은 곳에서 연관돼 있다. 사람의 정체, 자기의 정체란 기본적으로 대개 ‘부끄러운’ 경우가 많다. (그건 자기가 자기 속을 들여다보면 곧바로 확인된다.) 그래서 사람은 그 정체를 숨기고 감추고 가리고 덮고 싶은 것이다. 뻔뻔한 자일수록 그 수법은 아주 교묘하다. 그런 숨김엔 일종의 자기최면 자기기만도 작용한다. ‘나는 훌륭한 [적어도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공자는 ‘사람이 어찌 숨길 수 있겠느냐’라고 말한다. 숨길 수 없다는 것이다. 드러난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 사람의 ‘소이’와 ‘소유’와 ‘소안’을 ‘보면’(視, 觀, 察) 그 사람의 정체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가 훤히 보인다는 것이다. 참 기발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이러니 공자에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소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지금 한국어로 통용되는 소이 즉 까닭이라는 말과는 좀 다르다. 오히려 ‘소유’가 까닭에 가깝다. 소이는 ‘그것으로써 하는 바’, 즉 수단과 방법이다. ‘소유’는 ‘그것이 말미암는 바’ 즉 까닭 원인 배경이다. ‘소안’은 그 사람이 그 결과로써 편안해하는 바, 마음을 놓는 바, 흡족해하는 바(확대 해석하자면 좋아하는 바), 즉 그 사람의 가치관이 반영된 목적을 일컫는다. 그러니까, 소이는 그 사람이 어떻게 하는가 하는 것이고 소유는 왜 하게 됐는가 하는 것이고 소안은 무엇으로 만족하는가 하는 것이다.

‘소이’를 생각해보자. 이를테면 공자가 말하는 ‘不以其道得之...’(불이기도득지; 도로써 정당하게 얻는 것이 아니라면...)의 그 ‘이’(以)가 그런 것이다. ‘정당하게’ ‘정당하지 않게’ 그런 것이 소이에 해당한다.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사람들이 애쓰는 방식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누구는 노력, 누구는 폭력, 누구는 기도, 누구는 사랑, 누구는 선동, 누구는 아부, 누구는 비판, 누구는 사기 ... 한도 끝도 없다. 그것이 다 소이인 것이다. 그런 것을 살펴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 정체가 대체로 드러난다고 공자는 통찰한 것이다.

‘소유’는 또 어떤가. 사람의 움직임 내지 행위(생각, 계획, 말도 다 포함)는 그냥 일어나지는 않는다. 반드시 그를 움직이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이를테면 무언가를 하고 싶어서, 무언가를 갖고 싶어서, 무언가가 되고 싶어서 사람은 움직인다. 무슨 짓인가를 하는 것이다. 온갖 싶음들, 즉 욕망이 그 움직임의 바탕에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곧 소유이다. 태어나 죽을 때까지 인간들은 철저하게 욕망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다. 그 욕망에는 무수한 종류가 있다. 보통 사람들은 이를테면 ‘부귀’ 혹은 ‘공명’, 다른 말로는 돈 지위 평판 그런 것이다. (공자와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런데 누구는 ‘방치할 수 없는 문제들’로 인해 움직인다. 그 문제들이 아파서 움직인다.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움직인다. 이를테면 소크라테스는 ‘무지’와 ‘오만’이 아파서 움직였고 예수는 인간들의 죄와 타락이 아파서 움직였고 부처는 일체개고와 무명이 아파서 움직였고 공자는 ‘바르지 못함’이 아파서 움직였다. 그래서 그들은 ‘知’(앎)를 말했고 ‘愛’(사랑)를 말했고 ‘悔改’(회개)를 말했고 ‘度’(건넘)를 말했고 ‘正’(바로잡음)을 말했던 것이다. 그게 그들의 움직임이었다. 그런 것을 보면 그들의 사람됨이 한 눈에 드러나지 않는가.

‘소안’은 또 어떤가. 사람마다 그 흡족해하는 바는 다 다르다. 그것도 천차만별이다. 보통은 역시 부와 귀, 즉 돈이나 지위나 권력이나 명예나 인기를 갖게 되면 만족해한다. 누구는 승리에, 누구는 페이스북의 ‘좋아요’에 만족해한다. 역시 한도 끝도 없다. 그러나 그런 걸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누구는 멋진 시 한편에 만족해하고 누구는 아름다운 풍경에 누구는 따뜻한 말 한 마디에 만족해한다. 누구는 베푼 후에 비로소 만족해한다. 누구는 세상의 정의와 평화에 만족해하고 누구는 인류의 구원에 비로소 만족해한다. (예수의 산상수훈에 나오는 이른바 8복 ‘... 하는 자’는 좋은 참고가 된다.) 그 사람별 편차는 그야말로 천양지차다. 그러니까 그 만족의 척도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말을 한 공자는 놀라운 철학자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이 말을 거울삼아서 우리는 사람을 제대로 ‘볼’(視, 觀, 察)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한다.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 줄도 알아야 한다. 아마 신에게는, 염라대왕에게는 그 모든 것이 한 눈에 다 훤히 보일 것이다. ‘꼼짝 마라!’다. “사람이 어찌 숨길 수 있겠는가, 사람이 어찌 숨길 수 있겠는가! 드러나도 들켜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은 사람의 영원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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