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공신익희(申翼熙)선생
해공신익희(申翼熙)선생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5.24 18:11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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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신익희 1892-1956 경기도 광주 출생 호는 해공 동립운동가 정치가 일본 와세다. 대학 졸업 1917 보성전문대 교수, 1919년 3·1 운동에 가담 상해로 망명 외무 내무부장 역임 8·15 광복후 귀국 대한독립 촉성 국민회의 부위원장으로 민주정전 수립에 진력 자유신문사 사장 국민대 학장으로 취임 임시정부 주요 지도자인 김구 김규식 조소앙 등 애국지사들과 함께 1946년 임시정부를 설립 최초의 사립대 국민대학교 초대총장에 부임 민족인재 양성이라는 남다른 철학을 이어받어 꿈을 키우는 인재, 다른 길을 가는 인재를 키웠습니다.


대학 교훈을 이교위가 사필귀정(以校爲家 事必歸正)으로 작게는 학교를 내집 같이 사랑하라는 말이지만 크게는 내 나라를 내 가정 같이 내 민족을 내 가족 같이 사랑하라는 말이다. 선생은 대학의 학문 활동은 궁극적으로 국가와 민족을 구하는 길이라 하였다.

1948년 제헌국회 2대 의장이 되었고 민주국민당 최고 위원이 되어 2대 3대 의원에 당선 1955년 민주당을 창당 대표 최고위원이 된 후 1956년 민주당 공천으로 대통령에 입후보하여 다수국민들의 열렬한 지지속에 호남지방에 유세중 전북 이리역 주변 열차안에서 심장마비로 갑자기 병사했다. 그 후 국민장으로 치루었고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중장)을 수여했다. 64세를 일기로 비운을 맞아 국민들은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

장의 때 대만 장개석(1887-1975) 총통으로부터 보내온 만장(挽章)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추성일야 낙강성/(樞星一夜 落江城) 밤중에 큰별이 강변에 떨어지니, 지동천비 수자명/(地動天悲 水自鳴) 천지가 슬퍼하고 흐르는 물소리 높드라, 별루진진 창해활/(別淚溱溱 蒼海闊) 눈물이 모여 큰 바다를 이루니, 분심첩첩 태산경/(盆心疊疊 泰山經) 분한 마음이 쌓여 태산과 같고, 당당의기 생전업/(堂堂意氣 生前業) 당당한 기상을 생전에 업으로 삼으니, 열열충혼 사후명/(烈烈忠魂 死後名) 열열한 충혼은 죽은 후 이름을 남기고, 천추원한 언이간/(千秋怨恨 焉離間) 천추의 원한을 잊지 못하여, 적막황대 일월명/(寂寞荒坮 日月明) 고요한 황대에 달빛만 밝드라” 국민대학교는 초대학장인 해공 신익희 선생의 급작스러운 서거로 한때 어려움이 많았으나 1959년 쌍용그룹 창업자인 성곡 김성곤 선생이 재단법인 국민대학을 인수 새로운 전기를 마련 민족주의 산업주의 문화주의 인본주의를 육영이념으로 국민대학교의 중흥을 이루어 명문사학으로 거듭났다.

해공 신익희 선생은 교육자로 독립운동가로 정치가로서 국가에 공헌하였으며 국민들로부터 열열한 지지를 받아온 인물이였고 특히 중국과 교류가 두터웠다. 병사했다는 소식에 국민들은 큰 별이 떨어져 상념에 빠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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