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학사루와 김종직
함양 학사루와 김종직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5.31 18:51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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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김종직(金宗直 1431-1492) 조선 초기의 학자 호는 점필재(佔畢齋) 성균 사예 숙자의 아들 1459년 문과에 급제 성종 때 형조판서 문장과 경술에 뛰어났고 야은 길재의 학통을 이어받아 수백명의 제자를 길러내었다. 사후(死後) 연산군의 무오사화로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고 문집 등 일체의 작품이 소각되었다. 함양의 학사루는 원래 함양초 교내에 있었는데 루각의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운 최치원선생이 함양태수로 재직할 때 학사루에 올라 시를 읊거나 우국충정을 논의한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최치원 선생이 857년생으로 중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몇 년후에 함양태수로 발령 받았으니 1100여년 전으로 짐작할 수 있다. 학사루는 학자의 사용처로 내려오다 일제 강점기 때 부속 건물은 불타버리고 학사루만 남아있다.


1470년 성종원년에 김종직이 임금님께 노모를 모시겠다고 하여 함양군수로 부임 5년 동안 재임하면서 백성들을 풍요롭게 살수있도록 하였으나 불행한 일이 닥쳐왔다. 부임한지 얼마 후 학사루에 오르니 유자광(柳子光)의 시 한수가 걸려 있었다. 이를 보는 순간 하늘이 무너졌다. 당장 때서 태워버리라고 명하였다.

출신성분이 천하고 남이 장군을 역모로 모함하는 등 평소 매우 경멸한 자로 이 사건을 계기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던 유자광은 연산군이 등극하자 조의제문(弔義帝文=중국 진나라 숙부 항우에게 살해당한 초나라 의제를 조문한 글) 김종직이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 찬탈한 글의 풍자를 빌미로 1498년 연산군은 김일손 등 수십명을 능지처참하고 스승 김종직은 부관참시하는 잔인함을 보인다. 김종직은 마흔 넘어서 얻은 아들이 홍역으로 세상을 뜨자 실의에 빠진 김종직의 마음은 그의 시에 잘 나타나고 있다.

“내 사랑 뿌리치고 어찌 그리도 빨리 가느냐/다섯해 생애가 번갯불 같구나/어머님은 손자를 부르고 아내는 자식을 부르니/지금 이 순간 천지가 끝없이 아득하구나” 어린자식을 잃고 이듬해인 1475년 정3품 통훈대부로 승진 함양을 떠나게 된다. 생을 피우지 못하고 먼저 간 자식을 위하여 학사루 옆에 심은 느티나무가 지금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우람하게 자라고 있지만 심은 이유는 아들의 아호가 목아(木兒)였기 때문이다. 장구한 세월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느티나무는 군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군민을 지켜주는 수호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위풍당당하게 버티고 서 있다.

김일손은 1487년 진주향교 교수로 있으면서 정여창 김굉필 등 사림파를 형성했다. 훗날 사관 김일손이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어 뒷날 훈구파에 노출되면서 김일손 등 수십명을 능지처참하고 스승 김종직은 부관참시하는 잔임함을 보인다. 이 사건이 무오사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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