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에 대하여
배움에 대하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6.07 18:20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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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요즘 우리는 ‘배움’이라는 것에 대해 얼마나 생각하고 있을까. 그런 것을 과연 생각하기나 하는 걸까? (학생이, 선생이, 학부모가, 교육부가, 그런 걸 염두에나 두고 있는 걸까?) 우연이긴 하지만, 인류사의 대단한 책인 저 {논어}는 ‘學’(학) 즉 배움이라는 글자로 시작한다. 그 사실을 특별히 주목한 사례는 지금까지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 나라도 좀 주목하고 강조를 해보고 싶다.


적어도 공자라는 사람에게는 이 말이 특별한 무게를 갖고 있었다.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배우고 때로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않으냐.” 학과 습, 학습, 그것을 공자는 말하고 있다. 더욱이 그 ‘열’ 즉 ‘기쁨’을 말하고 있다. 그 많은 인간의 기쁨들 중 그는 배움의 기쁨을 놓치지 않고 이 발언을 통해 강조하는 것이다. 혹은 학습의 그 많은 효과들 중 그는 기쁨이라는 효과를 놓치지 않고 지적하는 것이다. ‘학습의 기쁨’, 이건 사실 보통 말이 아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배우고 익힘이란 ‘공부’를 말한다. 그런데 공자는 그 공부가 ‘기쁘지 않으냐’고 말한다. 세상에! 공부가 기쁘다니! 눈을 동그랗게 뜨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애당초 배움이란 무엇인가. 애당초 익힘이란 무엇인가. 배움이란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여지껏 알지 못하던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익힘이란 배워 알게 된 것을 잊지 않도록 거듭 되새기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 배운 것이 ‘내 것’이 되도록 나의 일부가 되도록 만드는 정신적 노력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것을 ‘영혼의 향상’이라 부르며 강조했다.) 그것이 공자는 기쁘다는 것이다.

배움에는 하나의 전제가 있다. 내가 아직 모른다는 것과 그것을 알고 있는 어떤 존재로부터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 것에 대해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 존재는 일반적으로는 물론 ‘선생’이다. 학교의 교사나 교수가 대표적이다. (글자 그대로 ‘가르치는 사람’이니까.) 그러나 좀 확대해 생각하자면 부모나 선배나 친구나 기타 등등 모든 사람이 다 선생이 될 수 있다. (“三人行 必有我師”라는 공자의 말도 참고해보라.) 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책이나 경험이나 기타 모든 ‘사물들’ ‘사태-사건-사례-일들’로부터도 배울 수가 있다. 배우고자 작정만 한다면 세상천지가 배울 것으로 가득 차 있는 셈이다. (학교를 졸업한 후 ‘나 자신’(moi-même)과 ‘세상이라는 거대한 책’(le grand livre du monde)에서 직접 배우고자 했던 저 데카르트도 좋은 참고가 된다.) 그런 것에 대한 배움은 세상에 대한, 그리고 사람에 대한, 삶에 대한, 소중한 앎을 선사해준다.

그런 제대로 된 배움을 얻게 된다면 거기엔 분명히 어떤 ‘기쁨’이 뒤따른다. 아마 누구보다도 그런 기쁨을 잘 아는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일 것이다. 그는 진리를 깨달은 후(이 깨달음도 넓은 의미의 배움이다.) 한동안 그것을 곱씹으며 그 기쁨을 즐겼다고 전해진다. 이른바 ‘법열’, 진리의 기쁨이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부처님처럼 그렇게 거창한 것은 아니더라도 비슷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내가 아는 아주 가까운 한 선배는 모 대기업의 임원으로 일하다 정년퇴임을 했는데, 퇴임 후 일종의 ‘학습’ 삼매에 빠져 있다. 일하느라 그동안(한 평생) 하지 못했던 공부를 원없이 하고 있다. 주로 책을 읽는 일이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다고 한다. 공부를, 배우고 가르치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내게는 아주 인상적인 말이었다. 재미도 넓게 보면 기쁨에 속한다.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기쁨. 공자의 말을 그는 몸으로 삶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기쁨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요즘 배우는 사람, 즉 ‘학생’들에게 한번 물어보라. 그 공부가 과연 기쁜 일인지. 어떤 아이들에게는 아마 세상에 그것보다 더 지겨운 일이 없을 것이다. 더 싫은 일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배우는 사람’이었던 저 학생시절도 한번 되돌아보자. 시험과 성적이 거의 절반 이상이었던 그 시절로 그 학교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기쁨과 지겨움, 이 괴리의 원인은 무엇일까. 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이런 현상에는 ‘학습’ ‘배우고 익힘’ 그 자체의 심한 왜곡이 있다. 마르크스의 이른바 ‘노동의 소외’를 좀 패러디 하자면 ‘학습의 소외’ ‘공부의 소외’ 그런 것이 있는 것이다. 공부에서 공부의 본질이 실종되어버린 것이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그리고 무엇을 위한 배움이며 학습이며 공부인가.

배움이라는 것이, 학습이라는 것이, 공부라는 것이 그토록 기쁜 일일진대, 그것을 지겨운 일로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우리는 그것의 기쁨을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비로소 사람다워지고, 세상은 그것을 통해 비로소 세상다워진다. 그런 배움을 통해 우리의 삶은 진정한 풍요로움으로 다가간다. 적어도 내가 아는 철학은, 그리고 문학과 역사는 그런 풍요로움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문화와 예술도 틀림없이 그렇다. 공자가 시와 음악을 언급한 것도 절대 우연은 아닐 것이다.

배움의 기쁨을 잊지 말자. 인생은 짧고 배울 것은 많다. 문득 셰익스피어의 저 말이 떠오른다.
“학생으로 계속 남아 있어라. 배움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폭삭 늙기 시작한다.” 그도 또한 저 배움의 기쁨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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