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여 부정탈라 정화수
행여 부정탈라 정화수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6.07 18:20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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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주/환경부 환경교육홍보단·경남환경연구원장
 

우리나라의 정화수에는 엄청난 민족의 정기가 어려 있다. 정화수를 정안수라고도 하는데 우리의 옛 여인들은 기도할 일이 있을 때 장독대에서 하얀 사기그릇 또는 깨끗한 바가지에 새벽 정화수를 떠놓고 빌어 왔으며 우리는 그 여인들의 후손들인 것이다.


꼭두새벽 아무도 모르게 장독대에 꿇어 앉아 정화수 앞에 기도하는 여인상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는 아마도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를 드리던 여인의 깨끗하고 소중하고 아름다운 마음 때문에 온 것이리라. 옛 여인들은 먼저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을 소중히 여겼다.

정화수는 이른 새벽 풀 이슬을 밟고 샘터에서 이슬을 품은 우물에서 떠온 맑은 샘물을 말하는데 자신의 온갖 몸과 마음을 다하여 정성스레 신에게 빌었을 것이다. 그 신은 뚜렷한 대상이 아닌 자연을 아끼고 사람을 사랑하는 인간 본연의 바탕일 것이다. 그 여인이 비는 것은 자신의 부귀나 자신의 영달이 결코 아니었다. 항상 나라나 농사나 남편이나 부모나 자식같은 가족의 안녕이었다.

물은 창조력의 원천이다. 고구려 건국신화 동명성왕의 어머니 유화부인은 용심연, 즉 물의 출신이었다. 신라 박혁거세의 비인 알영은 알영정이라는 물의 출신이었다. 고려 개성의 대정이라는 우물은 고려왕조의 성역이었다. 하늘의 남성인 왕과 물의 여성인 왕비가 만나 신화의 상징인 생명력과 풍요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물은 또 죽은 자를 살리는 재생의 기능이 있다. 무가에서는 바리공주가 위독한 부모를 구하기 위하여 서역국으로 가서 생명의 약수를 가져와 부모를 살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물은 신앙행위의 매체며 대상이 된다. 동제를 모실 때 마을의 우물을 깨끗이 치우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정화수는 가장 간소하나 가장 정갈하게 신에게 바치는 제수의 의미가 있다.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를 하기 전에 목욕재계를 하여 몸과 특히 마음을 깨끗이 하여야 함을 강조하였다.

정화수는 우리네 어머니들의 미신적인 행위가 아니라 타 종교에서도 우리의 정화수와 같은 행위가 있다. 성세수는 천주교에서도 보통 부활축일 때 축성하여 성당의 성수대와 가정에 옮겨져서 뿌리고 바르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2세기에는 집 축성에 사용하였고, 6세기경에 성당에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성수는 죄의 사함과 동시에 때로는 마귀를 쫓는 능력으로 사용된다. 기독교의 성경에는 침례와 세례식이 기록되어 있고, 예수와 사도들도 침례식을 행하는 등 성스런 물로 뿌리며 씻는 행위를 행하였다.

요즘의 현대인에게 정화수 이야기를 하면 자연숭배사상의 잔재나 미신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지만 정화수는 비과학적이고 종교적으로 망령되다고 판단되는 미신이 아니라 지구촌 모든 인간들의 성스러운 행위인 것이다.

물은 정화력이 있고 부정이나 객귀를 쫓고 사귀(邪鬼)와 재앙을 물리치는 벽사의 힘이 있다고 믿었다. 물 자체가 지닌 맑음이 부정을 물리치는 힘이 되는 것이다. 정화수에는 정화의 힘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또 작수성례라하여 집안형편이 여의치 못하면 정화수 한 그릇을 떠 놓고 혼례를 치르기도 했다. 우리 조상들은 그랬다. 항상 마음이 깨끗한 것을 우선으로 쳤고 자신의 복과 안녕을 비는 것이 아니라 남의 복과 가족의 안녕을 위해 정화수에 기원을 하였던 것이다.

값비싼 화장품과 화려한 옷으로 온갖 냄새를 풍기며 얼굴과 겉모습만 번지르하게 꾸미며 남을 헐뜯는 일이 다반사로서 보이지 않는 마음은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수많은 현대인들은 찬물에 목욕재계하고 어둠을 물리치는 이른 새벽에 정화수 한 그릇을 떠놓고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자신을 위한 간구가 아닌 남을 위하여 간절하게 기원하는 것은 가히 신에 버금가는 위대한 사랑의 실천이 아닐 수 없다. 정화수의 힘인 것이다. 꼭두새벽 아무도 모르게 한국의 여인들이 길어 오던 우물들이 이제는 비점오염원인 화학세제와 온갖 공해물질로 마실 물 뿐 만 아니라 우물과 지하수마저 오염이 된 지금. 더 이상 장독대에 꿇어 앉아 정화수 앞에 기도하는 우리의 어머니상인 한국의 여인은 이젠 영원히 볼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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