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 산홍(山紅)정부포상 추진
기생 산홍(山紅)정부포상 추진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6.08 18:35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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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실장
 

항일순국지사 매천 황현(黃玹)선생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1906년 11월조에 보면 의기 산홍(山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진주 기생 산홍은 재색이 모두 빼어났다. 내부대신 이지용이 천금을 주고 불러 첩으로 삼고자 했다. 산홍은 사양하며 “세상에서 이 대감을 오적의 우두머리라고 합니다. 첩은 비록 천한 창기이오나 자유로이 살아가는 사람이니 무슨 사유로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라고 말하니 이지용이 크게 화를 내며 두들겨 팼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세 앞에 당당함은 일개 기생이 아니라 절대 권력 앞에 맞서 싸운 기개어린 항일투사로 보는 게 마땅하다.

<대한매일신보> 1906년 11월 22일 2면에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이 진주 기생 산홍을 총애한다는 설은 각 신문에 보도되었거니와 이 내부대신이 산홍의 자색을 탐하여 작첩코자 하되 산홍 기생이 반대하여 “내가 듣기로 이 내부대신을 매국적이라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거늘 내가 근본 천기일지라도 이 내부대신과 같이 사는 것이 불가합니다”라고 말했다.

산홍 기생이 평생 의식주를 자족할 거금을 지급함에도 거부하니 이지용이 분개하여 산홍을 난타(亂打)하였다더라.

1906년 11월 이후 1년 3개월이 지난 1908년 2월에도 산홍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못했는데 마침 내부협판 이봉래의 생일잔치에 초대되자 이지용이 보석.반지 등 거금을 주면서 술에 취해 첩이 되어 달라고 공갈 협박을 하므로 산홍은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자결 순국했다. 양회갑(梁會甲) 선생이 쓴 정재집(正齋集)에 보면 ‘기생 산홍이 의기 논개의 정신을 이어 스스로 자결(自死)했다’라고 기록했다.

그러므로 논개를 모신 의기사 안쪽에 산홍의 시(詩)가 걸려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또 촉석루 아래 벼랑에 보면 가로. 세로 30cm정도 크기로 산홍(山紅)이란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정부는 자결 순국자 민영환(판서). 조병세(좌의정). 이준(밀사)열사 등 38명(경남출신 3명 포함)을 정부포상했으며 산홍의 포상이 성사되면 39번 째 순국항일투사로 기록된다.

매국노이며 최대 권력자의 요구를 거절하고 지조를 지킨 산홍이야말로 금전 만능의 현재 세대들에게 끼치는 교훈이 크다 할 것이다. 진정한 애국자요 항일순국지사로서 영원히 후세에 교훈삼고 훈육자료로 삼기위해 정부포상을 추진, 신청한다.

의기사에 걸린 산홍의 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천년의 긴 세월 진주는 의로움이 있나니 두 사당에 높직한 다락. 일없는 세상에 태어남이 부끄러워 피리와 북으로 어수선히 놀고 있네’ 진주 출신 작곡가 이재호(1919~1960)는 1940년 <세세년년> 제목으로 노래했고, 박노정 시인은 시 <산홍>에서 진주기생 정신 한 가락…… “카랑말짱하게 빛나고 있으니”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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