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용호 의병장을 추모하자
민용호 의병장을 추모하자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1.12.06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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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경화/항일투자열전1,2권 저자
민용호 의병장은 산청군 오부면 출신으로 소년시절의 행적이 고종실록에 등재되었다. 12세 때 성균관 생도가 되어 13세 소년기에 글과 문장이 뛰어나 고종의 응제에 으뜸으로 뽑히고 약관 20세 때 고종의 직부전식에서도 장원을 차지해 진사방목에 들게 되자 고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경기도 여주군에 사는 주서 민병성가에 기거할 때 명성황후시해 사건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리자 각 향교와 종친회 제각을 향해 퉁문을 돌리고 송현순 등과 함께 거병했다. 강원도 원주로 달려가 산포수 수 백명을 모아 강원도 관찰부가 소재한 강릉으로 쳐들어가 의로운 투쟁을 전개했다. 이 때 임금께서 모든 군사, 인사, 행정을 총괄해 달라는 조칙에 의해 강원도 일대를 다스리게 된다. 강원도 9개 군지역 연합 의진을 모아 9군도 창의소를 설치하고 주위 인사들의 적극적인 추대를 받아 관동창의대장이 되었다. 1896년 3월 원산공격을 감행했으나 날씨와 무기의 빈약으로 실패하고 강릉으로 돌아왔다. 노백헌 정재규와 유인석 선생 등과 서신을 교환하고 정보를 주고 받았고 고성, 양양 등지에서 승전고를 울렸다. 의병을 해산하라는 조칙을 받고 울분을 참지 못해 통곡했고 강원도 북부와 평안도 일대에서 활동하다 만주로 망명했다.

중국에 들어가 원세개에게 청병을 요청했으나 여의치 않았고 상해로 진출해 청나라 도움을 받기위해 동분서주하다가 귀국했다. 강원도 일대에서 투쟁할 때 심지에 불을 붙이고 발사를 기다리는 화승총으로 일제의 신식무기와 맞서 싸웠으니 참으로 대단한 투쟁이었음이 확실하다. 구식 무기를 가지고 일병 수백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고 일본 해군이 강릉으로 상륙할 때 신총통을 제작해 200여 명을 수장시킨 공적이 전해 온다.

의병대장은 문인이지만 무인다운 기백을 가진 분으로 문무겸전의 의병장이었음이 확실하다. 1903년 12월에 정3품 통정대부 비서원승으로 임명되어 활동했고 1905년 10월에는 고종께서 전국의 의로운 용사요 신뢰할만한 신하들 가운데 민용호, 유인석, 노응규, 이강년, 유종환, 정환직, 전해산 등에게 밀조를 내려 의로운 투쟁을 격려했다. 민용호 의병장은 일제만 상대해 싸운 것이 아니라 관군을 상대해 싸웠으며 일부 기독교인들과 대항함으로 무척 어려운 싸움을 전개했음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전공은 최근에 모두 발굴되고 확인되었으니 그의 공적이 영원히 빛나고 있다.

민용호 의병장은 중과부적을 느끼고 의병들을 집으로 돌려 보내고 귀향할 수밖에 없었다. 의병장도 부상을 당한 채 전북 무주군 어느 농가에서 치료도중 세상을 떠났다. 그의 후손들도 일제시대를 지나면서 그동안의 공적과 활동내용을 일체 함구하고 있다가 1945년 8월 광복이 되자 비로소 문집을 공개하고 1988년 이후에 복재집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았다.

최근에 직계손들과 산청군민들이 앞장서서 선양사업을 전개하고 있으며 한글 세대에 맞는 새문집의 발간을 준비중이다. 의병대장의 공적조사와 확인이 마무리되면 학술대회를 통해 공훈을 널리 고지하고 공적비와 기념관을 지어 영원히 기리는 작업을 전개해야 한다. 강릉시와 기념사업회의 손종환씨 등이 앞장서서 2010년 5월에 의병대장의 흉상과 어록비를 건립해 제막식을 거행했는데 약 8억 예산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민용호 의병대장은 산청출신중 가장 높은 훈장인 건국훈장독립장(국민장)이 1977년 12월에 추서될 정도로 공적이 지대한 분이었음이 분명하다.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그의 위대한 정신을 계승하고 추모할 선양사업의 추진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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