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여는 사람들
아침을 여는 사람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6.19 18:44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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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준/제2사회부 부국장(합천)
 

우리 사회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많은 사람이 밤낮없이 일하고 있다. 특히 보통 사람들이 어제의 고달픔을 달래며 편히 잠들어 있는 심야가 채 벗어나기도 전, 이른 새벽을 낮과 같이 일하며 아침을 여는 사람들이 많다. 밤새워 155마일 휴전선을 지키는 군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야를 운행하는 항공기나 열차, 버스 종사자들이 그렇고, 우리 주위에도 많은 사람이 밤을 낮같이 일하며 고생하고 있다. 물론 그들은 각 분야에서, 자기의 의무를 수행하거나 직업으로 일하고 있지만, 그래도 밤을 낮같이 부지런히 살면서 우리 사회를 살찌게 하는 사람들이다.


늦은 밤까지 편집과 인쇄를 마친 조간신문이 새벽 두세 시쯤이면 전국의 군 단위 지역까지 보급되고, 지역 보급소에서는 아직은 한밤중으로 인적이 없는 바로 이 시간부터 밤길을 돌며 독자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소식을 전한다. 지금 같이 인터넷이나 전파매체가 발달하여 매일같이 온갖 정보를 지겹도록 전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들의 역할에는 언제나 미흡한 부분이 있다. 신문이 그들의 미흡한 부분을 채워준다. 크고 작은 정책이나 사건·사고들을 좀 더 깊이 있고 상세하게 활자로 전해줘서 자세히 알도록 해 주는 것이다.

또 이른 새벽 손수레를 끌거나 자전거, 싸이카 등을 이용하여 골목골목을 돌며 우유를 배달하는 아주머니들이 있다. 새벽 골목길을 나서면 우유배달 아주머니가 언제 다녀갔는지 벌써 까만 비닐 우유 봉지가 곳곳의 대문간에 매달려 있다. 또 항상 거리를 깨끗하게 청소하는 환경미화원들을 빼놓을 수 없다. 환경미화원들은 사람이나 차량 통행이 뜸한 시간에 일하기 위해 캄캄한 새벽 거리를 쓸고 쓰레기를 수거한다. 밤사이 내놓은 온갖 생활쓰레기들, 특히 여름철 냄새가 역겨운 음식물 쓰레기들의 악취를 맡아가며 깨끗이 수거하여 거리를 깨끗하게 한다. 그리고 또 여명도 오지 않은 캄캄한 밤중, 백 리 길을 달려 도시의 농수산물 시장을 돌며 식재료들을 사다가 지역의 가게마다 보급하는 삶도 있다. 이 싱싱한 식재료는 바로 우리들의 아침 밥상에 오른다. 이렇게 밤을 낮같이 일하며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어 오늘도 밝고 깨끗한 아침이 열리고 활기가 넘친다. 항상 그들의 수고를 생각하며,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이렇게 새벽을 여는 이들을 보면서 가끔 예전 야간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을 떠올려 본다. 1945년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되면서 서울 인천지역의 사회질서가 극히 혼란하여 야간 8시부터 다음날 05시까지 야간통행금지가 시행되었고, 5년 후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우리나라 전체가 혼란에 빠지면서 전국적으로 자정에서 다음날 04시까지 통행금지가 시행되었다. 통행금지가 시행되고 있을 때는 자정이 되면 전국에서 한밤중의 정적을 깨고 사이렌이 울렸다. 그러면 이 순간부터 다음날 새벽 4시 해제 사이렌이 울 때까지는 누구도 거리를 통행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집안에 환자가 발생해도 새벽 4시 통금이 해제되기를 기다렸다가 병원이나 약국을 찾을 수가 있었다.

당시에는 이를 단속하는 경찰관들의 끗발이 보통 아니었다. 공무원들이 야간근무를 하고 가다가도 걸렸다 하면 끌려가 경찰서 대기실에서 새벽 4시까지 잡혀있어야 하거나 이튿날 불려가서 사정하며 조사를 받아야 했다.제5공화국 시절인 1981년 88서울올림픽이 결정되고, 국민 기본권 침해 논란이 되면서 다음 해인 1982년부터 전면 통행금지가 해제되었다. 그런데 당시 통금이란 구속에 익숙한 국민들은 그렇게 심한 불편을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야간 통행금지 없어지면 야간에 강도나 절도가 심해질 것이라며 반대 의견도 심심찮게 언론을 통해 나왔다. 필자도 통금이 없어지면 우리사회가 더욱 혼란해 질것이라는 기우까지 주장하였던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편협한 생각이던가 싶다.

야간 통금이 없어져도 사건 사고가 별로 늘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국민 생활의 많은 부분에 자유롭고 활발해졌다. 도시에는 편의점 등 야간 경제활동이 이루어지면서 국가 경제 활성화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지금도 일부에서는 제3,5공화국 시절을 군사독재의 시절로 혹평만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산업발전과 함께 학생 두발과 교복 자율화, 전국농촌에 매년 부과되었던 도로 부역과 전국 야간통행금지 제도 등을 없애고, 이 땅에 진정한 자유민주주의가 뿌리내릴 수 있는 토양을 만드는데도 상당한 역할이 있었음을 인정해야 옳은 것이 아닌가 싶다.

통행금지가 있던 그 시절을 생각하고, 지금 이른 새벽 아침을 열며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정말 격세지감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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