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를 읽고
<채식주의자>를 읽고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6.21 19:19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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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어제 토요일 밤에 다 읽었다. 매순간 시간들이 그렇지만 토요일 밤은 더욱 요긴하고 소중하다. 다음 날이 휴일이니 밤새 무언가를 해도 되는 것이다. 아니면 밤새 아무런 생산적인 일을 안 하고 노닥거려도 되는 것이다. 정기적인 휴일이 없었다면 자살할 사람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을 자주한다. 서양의 문화와 함께 기독교가 무섭게 그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일요일이라는 제도를 세상에 퍼뜨렸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어쨌든 토요일을 기해 독서를 다시 시작했다.


지난주에 다짐했던 대로 한강의 소설 책들을 주중에 거의 다 구입했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채식주의자>를 읽었다. 실로 얼마만의 소설 읽기인가? 참으로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지난 수년간 소설을 쓰지도 읽지도 못헀다. 그 동안 출간한 몇 권의 장편소설들은 오래 전 재고를 다시 퇴고해서 출간했다. 진짜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결혼이 늦다 보니 그에 따르는 모든 게 늦어졌던 것이다. 아이들 대학진학까지 일사천리로 밀어부치다 보니 작가인 주제에 소설을 쓰기는커녕 전혀 읽지도 못하는 못 미쳐서 살아지는 시간들이었다. 가끔 저절로 욕이 나왔다.

한강의 소설을 읽고 나자 이상하게 눈물이 난다. 자기연민. 내가 나를 연민해주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알아봐 주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나 아닌 남들을 나무랄 수는 더더욱 없는 일이다. 그들도 나처럼 저절로 욕이 나올 만큼 정신 없이 바쁘게 살기 때문이다. 조금만 생각해도 오히려 나는 다른 누구보다 사정이 나은 편일 것이다. <채식주의자>에 나오는 각각의 사람들 성격 중에 살아남을 수 있는 요소들을 필요한 만큼을 두루 소유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각각의 등장인물들이 파멸을 맞이해간 요인도 두루 갖추고 있다.

하지만 영악한 나는 제법 오래 전부터 그런 생존을 위해 살릴 건 살리고 죽일 건 죽여왔다. 예컨데 술자리에서 술이 취하도록 마시고, 동시에 줄담배를 피운다든가 하는 따위들은 내 인생에서 딱 잘라 끊어버렸다. 또 작가입네 하면서 영감을 얻기 위해 어쩌고 저쩌고 하는 걸 원천봉쇄했다. 내 사전엔 영감 따위는 없으며 다면 성실한 생각의 소산으로만 인생을 구축한다는 식이다. 내 존재 밖에서 나를 넘보는 귀신 같은 영감을 위해 몽롱한 눈으로 현재를 업신여기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기원했던 것이다.

반면에 항간에 떠도는 '예술가들은 배 고프다' 같은 뿌리 없는 낭설을 지나가는 개소리 쯤으로 여기기로 작정했다. 예술가가 왜 배가 고파야 하는가? 별 귀신씨나락까먹는 소리이지 않은가! 시간이 없어서? 머리가 나빠서? 게다가 나는 사지가 멀쩡하다. 예술가가 배가 부르면 좋은 예술이 안 나온다고? 이야말로 진짜 개가 풀 떧어먹는 소리 아닌가? 예술을 하면서 살자면 돈을 벌어봐야 얼마나 벌 것이며 모아봤자 얼마를 모으겠는가? 오히려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용케 빚 안 지고 살고 있다. 가끔, 아니 자주 더럽게 바쁘다고 비명을 속으로 삼킨다.

눈치챘겠지만 오랜만에 소설을 읽었다고 이 소설 이야기를 하자는 건 아니다. 물론 전혀 관련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관련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 글이 <채식주의자>에 관한 이야기가 못되는 가장 큰 이유는 이렇게 짧은 지면으로 이야기를 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다만 그 책을 읽고 맴도는 인상을 욕심없이 적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라도 <채식주의자>에 대해선 이야기하고 싶고 그럴 수 있을 때 조금씩 조금씩 철저히 이야기 하고 싶다. 귀한 친구를 만나 오래 오래 얘기하듯이.

제목이 <채식주의자>라고 꼭 채식주의자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지는 않다. 좋은 소설들이 다 그렇듯 인생을 이야기하기 위해 소재로 극단적인 채식주의자를 등장시켰을 뿐이다. 그리고 그 사람을 중심으로 주변 인물들을 통해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보여준다. 또한 좋은 소설이 다 그렇듯 인생의 쓴맛을 주로 보여준다. 그 쓴맛은 극단의 경계에서 발생되는 것이다 보니 일면 무섭고 일면 아름답고 일면 감동적이다. 그것은 결국 인생을 파멸로 이끈다는 데에 이르니 무섭고, 잡스러운 것에 섞이지 않은 순수함이니 아름답고, 이견의 여지가 없는 진실이다보니 감동적이다.

소설은 잡식주의자들이 주를 이루는 세상에서 채식주의자로 살겠다는 사람과 채식주의자을 반대하는 사람과 반대도 찬성도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세 종류의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다. 때로 우리는 찬성도 반대도 않는 사람들의 존재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이 사람들이 찬성과 반대 어느 쪽에 손을 드는가에 관심이 집중되기도 한다. 그들이 어느 쪽으로 붙느냐에 따라 각 힘의 세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는 반대도 찬성도 않는 사람이 채식주의자의 강렬한 생명력에 이끌려 치우쳐 찬 반 양쪽 모두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

좋은 소설이라고 파멸마저도 아름다운가? 절대로 아니다. 파멸은 언제나 가엾고 비참하고 안타깝다. 그리고 한없이 슬프다. 그래도, 그래도 말이다 우리는 끝까지 자신의 몫의 삶을 살아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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