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6.28 18:58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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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영산의 정기를 받아 1908년 6월 21일(부-황(璜): 모-김씨)에 윤봉길은 태어났다. 6세에 큰아버지 밑에서 한학을 수학(修學) 10세에 덕산 보통학교에 입학 12세 때 3.1독립운동에 자극을 받아 식민지 노예교육을 배격하고 학교를 자퇴 한학을 배웠으며 14세 때 매곡 성재록의 조치서숙에서 4서 3경등 한학을 수학 15세 때 성주배씨(用順)와 결혼 아들종(淙)을 두었다.


경서와 시문을 열심히 하는 한편 신학문의 습득도 하여 농촌운동의 경륜과 사상의 기틀이 잡혔다. 17세 때 명추(明秋), 옥수(玉水)등 한시집을 펴내어 학문이 심화(深化)되어 수신치국(修身治國)의 태도로 앞으로 갈길이 무엇인지 깊은 성찰을 하여 어느날 오치서숙 앞 한 청년이 공동묘지의 묘포를 뽑아들고 아버지의 묘를 찾아달라하자 매헌은 여기에 충격을 받아 이 청년은 무식으로 부모의 묘를 잃고 우리겨례는 무식으로 나라를 잃었음을 깨달은 매헌은 문맹퇴치와 농촌부흥운동에 앞장서기로 다짐. 19세때 서당을 그만두고 독서회를 조직 야학을 열어 젊은 이들의 교육에 앞장 농촌운동에 뛰어들었다. 1929년 부흥원을 세워 농민독본을 저술 애국사상 약소민족의 해방과 자유 등 외치며 독립운동정신을 고취했다.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불생환(丈夫出家不生還)이란 유서를 남기고 23세로 만주상해로 망명 상해 영어학교에 다니면서 백범 김구선생을 만나 서로 상통하였다.

이때 상해주둔 일본군은 그들 천황의 생일 경축식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매헌은 일본군의 수뇌를 폭사 시키기로 결심 4월 29일에 물통 도시락 폭탄 2개를 가지고 홍구공원에 입장식이 시작되고 일본의 국가가 울려 퍼질 때 단상을 향하여 폭탄을 던지니 폭음과 단상이 수라장이 되었다. 사령관 백천의즉(白川義則)과 거류민단장 하서(河瑞)는 폭사하고 중광공사등 10여명은 중상을 입었다. 매헌은 가슴에 품었던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쾌거였고 온 세계를 뒤흔들었다. 5월 25일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자 매헌은 “너희와 우리는 역사 풍습 언어가 다른 이민족이다. 너희가 우리를 통치한다는 것은 극동의 평화를 파괴하고 인류 자유를 말살하는 야만적 행동이라고 꾸짖었다”

곧 일본으로 호송 1932년 12월 19일 오전 7시 40분 금택(金澤)교외에서 총살형으로 순국 향년 25세로 매헌은 죽음에 앞서 엄숙한 표정으로 “남아로서 당연한 일을 하였으니 만족하게 느낄뿐이라고 하였다”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청년이 했다고 찬양하였다” 조국이 광복되자 1946년 5월 매헌의 유해가 고국으로 봉환 국민장으로 서울 효창공원에 모시고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을 추서하였다.

1965년 매헌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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