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알 같아진 시간
총알 같아진 시간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7.05 19:12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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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소설가
 

아주 오래 전 친구와 문답놀이를 했다. “쏜살보다 빠른 것은?” 멍때리며 쳐다보는 나에게 친구는 안쓰러워 하며 팁을 주었다. “흔히 우리 쏜살처럼 빠른 세월이라고 하잖아?” 나는 서둘러 대답했다. “총알처럼 빠르게 가는 시간, 그러니까 쏜살보다 빠른 건 총알!!! 맞지?” 하고 스스로의 총기에 놀라 까르르 까르르 웃었던 적이 있었다. 내가 너무 빠르게 정답을 외치자 이번엔 친구가 멍때렸다. 그 친구는 아들만 둘을 두었는데 둘 다 장가를 보내 며느리가 둘이나 된다. 커다란 노트 가득 시를 쓰서 읽어주던 친구였는데, 참 세월하고는. 그 친구 이야기나 해볼까?


지난 설날을 맞아 내가 진해로 가서 만나고는 여태 전화 한통 주고받지 못했다. 그래도 이상할 건 없다. 언제든 만나면 또 어제 만난 것처럼 히히득거릴 테니까. 돌아보니 정말 세월이 총알처럼 지나가버렸다. 설날에 만나 하이고, 우리 나이가 언제 이렇게 됐느냐, 환갑이 낼 모래다, 니는 염색을 안 해서 좋겠다느니, 나는 염색을 안하면 완전 백발이라느니, 요새는 새로운 시를 도저히 외우질 못하겠다느니 하면서 깔깔댔다. 친구나 나나 웃음이야 백세가 돼도 깔깔거려 볼 참이다. 까르르 까르르, 까짓거 망령이 들었다 소리쯤 대순가 말이다.

그러니까 그 친구를 만나 벌써 새해라느니 한 살 더 먹는다느니 주절거렸는데 그 새해도 벌써 허리를 푹 꺽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곧 무더위가 죽일 듯이 밀려들겠지. 덥다고 덥다고 죽을 듯이 축축 늘어지겠지. 서늘한 바람이 언제쯤 불어오나 하고 여름을 저주하겠지, 죽음의 계절 추운 겨울이 점점 가까이 오는 줄도 모르고 세월을 제촉하겠지, 바보처럼 말이다. 인생이 왜 이다지 어리석은지. 좀 현명해보려고 인생은 '지금'이라는 시간이다, 그러니 아무리 더워도 지금을 즐기며 행복하자고 해보지만 지금이라는 시간은 언제나 우왕좌왕 흘러간다.

지금도 나의 오래된 친구에 대해 얘기하기로 해놓고 자꾸 옆탱이로 가려는 말머리다. 그래, 그 친구는 시를 쓰는 '버으진'이었던 것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결혼 후 남편이 독서를 못하게 했다. 독서를 못하니 시를 쓰는 건 꿈도 못 꿨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이게 아주 심각한 일이었다. 친구의 남편은 시간이 갈수록 강하게 독서를 방해했다. 친구는 남편 몰래 독서를 하는데 참으로 눈물겨운 일이었다. 자연 남편이 없을 때 책을 읽는데 독서삼매에 빠져있느라 남편의 귀가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도둑 독서를 들키면 안 되니까 그런 기발한 독서법을 개발했다. 서랍장 서랍을 반쯤 열고 거기에다 책을 놓고 보다가 기척이 있으면 옷을 정리하는 듯이 주섬주섬 책을 옷 속으로 숨기면 감쪽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제법 오래 볼 수 있었는데 그것도 어느날 들켜서 끝장났다나 어쨌다나. 그것만 빼면 보기 드물게 진국인 남자인데...

고민 끝에 친구가 얻은 남편에 대한 결론은 친구를 진국으로 사랑한 때문이라고, 친구와 사는 게 지고지순 만족한데 책을 읽어 보탤 게 없다는 논리로 책을 못 읽게 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달라진 건 없었다. 친구가 원하는 건 언제 어디서나 마음껏 독서를 하는 것인데. 어려운 시절을 다 겪어내고 살만해진 지금도 친구는 독서만은 마음껏 못하고 있다. 아이들 등록금이 없어서 빚을 지고 그 빚 독촉에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인 어려운 때에도 참으로 성실하게 지혜롭게 씩씩하게 헤쳐나가는 중에도 얼핏얼핏 독한 쓸쓸함을 내비치는 친구가 안타깝다.

친구도 어려우면서 나의 어려움까지 살펴주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을 생각하며 친구를 위로할 뭔가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내가 출판사를 하고 있으니 시집이나 산문집을 내주고 싶다. 그래서 기회 있을 때마다 원고를 모아두라고 하면 친구는 조금 떨뜨름해 하는 눈치다.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르겠다. 아마도 평생 남을 도와주는 생활을 하다보니 그게 습관이 된 모양이라고 짐작한다. 막상 내가 친구를 돕겠다고 하면 니가 나를? 하게 되는 거겠지. 내 마음은 까닭없이 쓸쓸해진다.

초여름 휴일이 저물어간다. 아침에 일찌감치 일어나서 해뜨기 전에 이것저것 아침일들을 하고 아들이 먹고 싶다고 해서 돼지고기를 넣고 묵은지찜을 해서 가족들을 먹였다. 아침 근행을 드리고 나니 나른해서 한 시간쯤 자고 일어났다. 수박장수가 수박을 사라고 외쳐서 만원짜리 한장을 움켜쥐고 달려나가 수박을 두 덩이 샀다. 작은 것 한 덩이와 중간 크기 한 덩이를 사면서 천 원을 에누리 했다. 뿌듯해 하며 식칼로 수박 배를 쫘악 갈랐더니 후래쉬한 수박향이 집안에 화악 번지며 나를 위로해주었다. 남편은 꿀이네, 꿀 이라고 말해 나를 위호했다. 잘 골랐다 이거지.

다섯 시 이전까지 이 글을 마무리 하자고 달리고 있다. 잠시 전엔 하도 졸려서 김을 씹으며 졸음을 쫓았다. 방귀 길나자 보리쌀 떨어진댔나? 졸음을 마저 쫓고 정신이 말똥말똥해지니 글을 마무리해야 한다. 총알같은 시간이 미사일 같아지기 전에 '지금'에 집중하자

다가오는 추석에는 친구를 찾아가서 원고 모으기를 좀 적극적으로 독려해야겠다. “친구야, 우리 환갑이 낼 모래네, 잠들기 전에 하루하루 살아낸 시간들을 다믄 몇자라고 적으소, 또 읽고 느낀 감회도 기록하소. 머지 않은 날에 야아, 우리가 팔순이야, 할 날이 닥치지 않으까 말이지” 그리고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책을 만들어보자. 내 친구의 인생이 오롯이 다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렇게 책을 내는 게 길이 나면 2탄 3탄도 나올 수 있다. 그 친구의 저력을 나는 안다. 그리 되면 그 친구의 귀한 인생이 조금이라도 더 빛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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