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그리고 철학-첫 번째 이야기
예술, 그리고 철학-첫 번째 이야기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1.12.11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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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조/premiere발레단 단장
첫 번째 일어난 일. 언젠가 미술과 관련된 한 공중파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있었다. 그 속에는 사회적으로 이름이 꽤 알려진 한 사람이 나와서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이나 작가를 소개하는 시간이 편성되어 있었다. 그 날의 주인공은 소설가 조정래 씨. 선생께서는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얽힌 일화를 말씀하셨다. ‘태백산맥’을 집필하시는 동안 열 번도 넘게 오르셨다는 지리산. 그 날도 어김없이 선생께서는 산에 계셨고, 그 밤을 지내실 생각으로 장터목산장에 잠시 여장을 푸셨다 한다. 그 밤, 선생께서는 하늘에서 빛나고 있던 수많은 별들을 보시며 고흐의 그 작품을 떠올리시기에 이른다. 그리고는 하나의 다짐을 마음속에 새겨 넣으신다. ‘태백산맥이 탈고되기까지 저 별들을, 저 밤하늘을 나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어야겠다’ 끝내 그 소박한 꿈을 이루지 못했다 하셨다. 선생의 담담한 말씀이 나에게는 우레와 같은 외침으로 들렸다. 참된 예술, 만약에 그런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언어의 세상 저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이리라는, 또한 그리될 수밖에 없으리라는. 그리하여 그것은 한낱 ‘보잘 것 없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일 수밖에 없으리라는 예술의 무가치성에 이르게 된다.

실례로 고흐는 생전에 단 한 점의 그림도 팔지 못했다. 그나마 교환가치라도 지니고 있었던 것은 그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빵과 바꿔버린 단 한 점의 그림이 전부다. 그가 그렸던 모든 그림들은 애당초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느 누가, 어느 작품의 이름을 댄다 해도 그것은 한낱 보잘 것 없는 그 무엇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낱 보잘것 없는 그 무엇은 엄청난 그 무엇으로 탈바꿈하기에 이른다. 왜? 

두 번째 일어난 일. 지난 주 무용공연을 하나 봤다. 개인공연이었다. 해석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공연이 시작되기 전 일부러 소개책자를 읽지 않는 버릇은 그날도 어김없이 나의 몸에 바짝 달라붙어 있었다.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었지 않았느냐고 자문하며 집에 돌아와 소개책자를 펼쳐들었다. 갑자기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철학적 미사여구들. 크나큰 배신감과 서글픔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그 후, 황량해져 버린 내 마음의 갯벌에는 어느덧 부정적 수긍의 흔적이 새겨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고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 철학이 이렇게 쓰일 수도 있구나’ 동시에 자신을 돌이켜 본다. 철학이라는 것을 이리저리 붙들고 오는 동안 단 한 번도 철학을 가벼이 여긴 적은 없는 듯했다. 철학하기를 위해 부딪쳐 왔던 수많은 난관들. 단어하나하나, 개념 하나 하나, 그것들을 곱씹고 되새겨 왔던 나 자신, 그리해도 그것들을 아직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어리석은 나 자신이 무척이나 부끄러울 정도로 그 공연은 철학이라는 아주 훌륭한 포장지에 둘러 싸여 있었다. 스스로를 예술가-철학자라 여기는 듯 보이는 한 개인에 의해서 철학은 그렇게 소비되고 있었다. 명품이 소비되듯. 철학의 엄밀함과 혹독함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단지 한 개인의 허영을 채워주고 있는 도구로 전락해버린 철학은 훌륭한 소비의 대상으로 화해버린 듯했다. 비단 철학뿐이겠는가. 가히 소비사회라 불릴만하다 싶었다. 지금의 이 사회. 실상 철학은 그렇게 소비되는 것이 아닌가. 교육 서비스를 생산한다는 대학들을 통해, 바람직하고 가치 있는 지식과 지혜를 생산하고 유포한다는 책들을 통해, 심지어는 그러한 취지의 동영상 강의들을 통해 하지만 정작 공연의 당사자인 그 개인 자신은 철학하기를 위한 철학의 소비는 하고 있지 않은 듯 했다. 왜?

그 개인이 공연의 처음과 마지막에 나와서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며 몇 번이나 되풀이 했던 한 단어가 문득 떠오른다. 바로 ‘언어’였다. 자신의 몸이 하는 일들의, (그것들을 무엇이라 불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언어’가 바뀌었다고 말한다. ‘언어의 세상 안’에 머물러 있는 예술은 이제 ‘보잘 것 있는’ 예술이 된다. 이것이 예술일 수 있는 이유. 바로 철학 때문이다. 철학하기가 몸에 배여 있지 않은 유사철학자들이 멋진 포장지로 삼는 철학.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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