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 공부
간디 공부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7.19 18:40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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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소설가

 
강영/소설가-간디 공부

비폭력의 대명사 마하트마 간디는 우리 인류의 귀감이다. 흔히 볼 수 있는 물레를 잣는 간디 라든가 흐름한 옷차림으로 샌들을 신고 길을 걷는 간디는 우리 서민들을 한없이 위로한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지금까지 사람들을 위로하는 데엔 그의 고통이 너무 고맙기도 하지만 마음이 아프다. 하는 일이 성공하면 성공하는 대로 실패하면 실패하는 대로 얼마나 많은 시기와 질투와 방해와 심술이 있었을 것인가. 그래서 우리는 더욱 간디가 남긴 족적들에 감동되는 것이다. 그가 한 말 한 마디 한 마디와 작은 행동들까지도 아직것 남아서 우리를 위로 하다니.

간디가 한 말 중에 ‘위대한 운동은 무관심, 조소, 비난, 억압, 존경이라는 다섯 단계를 거친다’라는 말이 있다. 앞의 네 가지를 거친 이후에나 존경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 역시 간디가 몸소 겪어서 얻어낸 이치라는 사실에 마음이 아프기까지 하다. 앞의 네 단계가 일상생활에서 지속적으로 계속되는 걸 당하는 건 정말이지 인간이 견딜 수 없는 상황이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실은 무관심이나 조소와 비난과 억압 같은 따위들은 우리 인간들만이 행하는 더러운 속성이라는 것이다. 개나 소나 고양이나 말은 그 따위 것들 안 한다.

무관심만 해도 우리 일상에서 너무도 흔하게 일어난다. 무관심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어제 저녁에 마을버스를 타려는데 안면 정도 알고 있는 이웃 애기엄마가 커다란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곤 같은 마을버스를 탈 모양이었다. 알은 척을 하며 함께 탈 것이냐고 묻곤 내가 유모차를 가지고 탈 테니 아이를 잘 안고 타라고 일렀다. 애기엄마는 다급했던지 고맙다는 말도 없이 아이를 유모차에서 안아내렸다. 내릴 때는 또 다른 이웃 아줌마의 도움을 받아 유모차를 가지고 내렸다. 애기엄마가 살고 있는 집이 이층이라는 걸 아는 내가 거기까지 유모차를 운반해주었다. 나를 보내면서 애기엄마는 “진짜 진짜 고맙습니다”를 다섯 번은 넘게 하면서 서울에서 집까지 오는데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 남자들은 더욱 절벽들이었다는 말을 서둘러 했다. 나는 웃기만 했다. 사람들아, 특히 남자들아, 살기 팍팍하겠지만 조금만 더 힘내자고요!!!

조소, 이거 한번만이라도 받으면 기분이 엿같지. 조소는 비꼬기인데 이것 역시 일상이 됐다. 특히 청소년들의 언어에서 비꼬는 말투가 도드라진다. ‘어쯜? 안물? 안궁!’ 상대의 말이 어떤 내용이든지 어쩌라고? 라고 반문해서 말하는 사람을 무색하게 만든다. 상대가 자기 얘기를 시작하려고 하면 안 물어봤는데 왜 말하느냐를 줄여서 안물, 하고는 눈을 힐긋 흘기는 것이다. 얘기를 하는 사람은 어쩌면 아주 깊은 고민을 털어놓기 위해 애써 가볍게 운을 떼는 것일 수도 있는데 대뜸 그 따위로 말해버리면? 게다가 안 궁금하다는 말까지. 그러면서 자기의 얘기는 하고 싶고.

비난은 말할 것도 없이 사악한 짓거리인데 이거 너나 할 것 없이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불륜도 남이 하면 불륜이고 자기가 하면 지고지순한 사랑이다 라는 말도 있다. 또 비판과 비난이 구분이 잘 안 되는 수도 있다. 습작기에 습작을 합평회 하면 유난히 비판에 약하고 예민한 사람이 있다. 그러려면 뭐하러 합평회에 작품을 냈을까 의아한 정도로 화를 내는 사람도 있다. 그러고 보면 비난은 안 받고도 안 될 일도 많다. 비난은 안 받고 맨날 칭찬만 받는 사람은 온실 안의 화초와 같아 비바람 눈보라에도 강한 생명을 기를 수가 없을 것이다. 어느 석학이 말하길 ‘나에 대해 호응하는 사람보다는 반대하는 사람에 의해 성장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했다. 비난을 잘 받아들여 자신의 성장 밑거름으로 삼을 정도로 비난 앞에서만은 조금 뻔뻔해질 필요가 있겠다.

존경을 받기까지의 단계 중 맨 마지막 단계인 억압은 개인이 하는 억압과 집단이 행하는 억압이 있을 것이다. 개인의 억압은 누군가 치마를 너무 짧게 입었을 때 그의 아버지가 대문 밖으로 못 나가게 호통을 치는 경우 등일 것이다. 지금도 학교에서 교복 치마 단을 검열하고 기준 이상으로 짧으면 억지로 치마단을 터버린다고 한다. 인권 모욕이 분명하다. 그러나 더 심각한 건 국가라는 집단의 억압이다. 여러가지 야비한 방법으로 사상검열을 하고는 종북이네 빵갱이네 낙인을 찍어버린다. 알고 보면 결국 자기들의 입장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하는 교묘한 짓거리다. 특히 종교적인 집단들이 각 각의 입장을 세우기 위해 이단이네 사이비네 해서 서로를 억압하는 경우가 흔하게 발견된다. 어느 개혁이든 처음엔 이단 아닌 적이 있었던가. 기득권이란 그토록 워낙에 고질적인 것이다.

위의 네 단계를 거쳐서 존경에 이르기는 그야말로 하늘에 별따기만큼이나 어렵고도 어렵다. 누구는 무관심이나 조소 비난의 단계에서 일찍이 자기의 정체성을 잃어버린다. 이 세 단계를 용케 견디고 대 용기와 지혜를 발휘해서 억압을 견뎌보려고 애를 쓰지만 이 과정이야말로 뼈를 깍는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개인이 소속된 집단에서 아웃되면 그것으로 끝장이라는 긴장감과 두려움에 정말이지 피를 말리는 성장통을 겪어야 한다. 실제로 감옥을 왔다갔다하는 수도 있다. 실제로, 거지가 되어 길바닥에 나뒹구는 수도 있다. 그러나 고지가 바로 저긴데!!!

일제 말기에 이은상 시인은 절규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순 없다’ 또 불가에서는 말한다. 참는 자야말로 부처다. 올바르고 올곧고 사랑스럽기까지한 인생의 목표를 애시에 세우고 참고 참으며 외려 즐기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자. 사랑스런 나의, 우리의 사람들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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