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중국(中國)의 종교(宗敎)(Ⅷ)
칼럼-중국(中國)의 종교(宗敎)(Ⅷ)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7.24 19:05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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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웅/경상대학교 인문대학 명예(강의) 교수ㆍ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위원장ㆍ지리산 막걸리학교 교장
 

강신웅/경상대학교 인문대학 명예(강의) 교수ㆍ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위원장ㆍ지리산 막걸리학교 교장-중국(中國)의 종교(宗敎)(Ⅷ)


지난번에 이어 중국 종교의 세부적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앞서 보듯이 만당(晩唐) 이후의 불교의 중심지는 인도보다 오히려 중국에 옮겨온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불교는 중국 전통적인 유가와 도교 사이에서 서로의 조화도 있었지만 서로의 충돌은 심각했다. 특히 도교와의 알력은 더욱 피열했다. 불교가 처음 전래되었을 때에는 불교의 진의를 몰라 도가와 혼동했고, 한나라 환제는 불 ․ 노(佛老)를 한꺼번에 제사지내기도 했다. 두 가지가 모두 신령의 불멸을 믿으며 재계제사를 일삼거나, 공(空)이나 무(無) 같은 비실재를 본체로 여기는 점에서 공통성을 띠고 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도(佛道)의 충돌은 도교가 흥성한 위진남북조 시대에 가장 격렬했다. 진(晉)대의 도사인 왕부(王浮)가 <노자화호경(老子化胡經)>을 통해 불교를 풍자함을 비롯해 북위(北魏)의 대무제(大武帝), 북주(北周)의 무제(武帝) 등의 승려학살, 사찰 소각 등의 불교 탄압이 있었고, 그 여세는 당 무종(武宗) 때와 오대(五代) 후주 세종(世宗) 때까지 미쳐 절 3만여 군데를 불사르기에 이르렀다. 이런 탄압은 대강 신흥 외래 세력인 불교의 정연한 교리와 급증하는 교세에 대한 일종의 질투라고 볼 수 있었다.

한편 당 고조(高祖) 무덕 8년(625) 때부터 고조가 석전(釋奠)을 거행한 뒤 유·도·불의 3교도가 모여 교리를 강론했다. 서로가 고립하지 않고 서로 융합하고 관통했으니 이 양향은 오대(五代) 이후에 유가에게 이학(理學)을 촉진시켰고, 송명(宋明) 이후 민간에게는 3교합일의 이론을 진작시켰다. 유·불·선(儒佛仙)의 조화론이 몇 세기를 대두했으나 불교의 전파는 더욱 가열 일로에 놓였다. 위진(魏晉) 이래 불교가 없었다면 중국문화는 또 다른 체질로 성장되었을이만큼 그 영향은 크다. 거기에는 많은 결정적인 원인이 따른다.

첫째, 불교의 전래되는 시기가 적중했다. 동한(東漢) 이후 몇 세기는 줄곧 난세와 외우내환·폭정·질병 속에 시달려 왔다. 한편 중국의 고유 종교가 서주(西周)로부터 예악화된 뒤 정신적인 공허함을 메우기 어려웠던 만큼 한정이 있는 방술(方術)만을 운용하는 도교로써 구제받기보다는 불교에 훨씬 경도되었다. 학술적으로 현학(玄學)을 즐기는 시대인지라 마침 불교의 교묘한 변론은 당시 지식인들의 현담의 낙취(樂趣)에 만족시킬 수 있었고 동시에 현실을 도피할 수 있었다. 또한 도교와 시대를 함께 한지라 지식인에게 그 교리를 비교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나 결국 도교는 허점만을 노출시킨 것이다.

둘째로, 불교단체의 엄밀한 조직과 강력한 계율, 그리고 체계 있는 이론이 강점이 되어 지식인을 포함한 민간에게 파고들어 갈 수 있었다. 이렇게 자체 내의 정비 강화뿐 아니라 한(漢)대로부터 역대의 많은 제왕이 불교를 신앙하면서 이를 장려했다는 정책적인 배경이 있었다는 것이다.

셋째로, 불교의 교리나 신앙 방법이 중국 전통문화 정신과 융합되는 곳이 많다는 점이다. 불교가 개인의 신앙 여부에 따라 구제를 받는다는 가능성은 유가의 근본 교의에서도 발견할 수 있거니와 관용적이고 평화적이며 대동적인 자비정신 또한 유교의 전통정신과 합치되는 것이다.

불교의 영향은 더구나 막대하다. 크게 문학예술ㆍ학문 사상ㆍ사회 등 세방면으로 검토해 보면 다음과 같다.

불교가 전래된 뒤 예술 방면의 영향은 문학보다 앞섰다. 불상과 벽화는 위진 남북조의 대표 예술이 되었으니, 동진(東晉) 때 중 축도일(竺道一)의 금섭지천상(金鍱之千像), 도안(道安)의 장팔미타동상(丈八彌陀銅像), 혜획(慧獲)의 장육석가동(丈六釋迦銅)은 불상의 남상이 되었고, 그 뒤 당 무후성력 때의 천불암(千佛岩), 남북조 때의 대동(大同) 및 용문(龍門)석불, 당(唐)대의 선무산(宣務山)·향당산(響堂山)·대불사(大佛寺)·천불산(千佛山) 등의 조각은 각 조대의 백미였으며, 당대엔 벽화의 기풍이 왕성하여 선도(善導)대사가 그린 정토변상(淨土變相)이 300여벽, 오도현(吳道玄)이 장안·낙양에 그린 것이 300여벽이나 되었으니 송대까지 유존된 당대 벽화는 8524칸이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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