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밑 유감
세밑 유감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1.12.12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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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현옥/작가ㆍ약사
# 늘 제자리에 놓여있는 달력을 매번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보는 것은 아니다. 대개는 무심하다.

그러다 마지막 한 장을 남기고, 더 이상 넘길 것이 없어지고 나면 달리 보인다. 새삼 애틋하고 각별해져서는 매일 매일을 챙기다가 마침내 조바심이랄까 초조함이랄까 어쩔 수 없이 쫓기는 심정이 된다. 사람이 느끼는 속도감이 그러는 것일 뿐 시간은 균질하게 흐르는 데도 말이다.

하지만 한 해를 보내는 사람들의 감정의 폭은 물리적 시간의 양보다 언제나 크고 넓고 깊다. 뭉텅 뭉텅 한 번에 잘려져 나가는 시간을 보며 사람들은 많은 생각에 잠긴다. 가까운 사람들과 지지고 볶던 일이며 생채기라도 입을까 겁을 내며 지레 움츠리던 시간을 후회한다. 얻고 이루고 지니게 된 것보다 잃고 실패하고 흘려보낸 것이 더 많았던, 그래서 세상을 향해 노여워할 줄만 알았지 나누고 물러나는 일에는 인색했던 한 해를 안타까워한다.   

이런저런 후회와 성찰 속에 저물어가는 한 해 잘 마무리하시라는(요란한 이모티콘과 함께) 문자메시지가 이제 곧 무차별(!)적으로 날라들겠지만, 허공을 향해 날린 운명의 화살을 어디서 발견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친구의 심장이 될지 동그라미 몇 개가 줄거나 는 통장이 될지 혹은 떡갈나무 숲이 될지.   

# 몇 군데 연하장을 보내고, 올해를 정리해본다. 숫자로 채워진 대차대조표가 아니라 눈물과 웃음, 한숨과 희열이 훑은 가슴을 열어서.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는지,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떠나보냈는지.

쉬지 못했다. 한자어 쉴 ‘휴’는 사람이 나무에 기대어 있는 편하고 아름다운 글자다. 올 여름 그렇게 아름다운 ‘휴’를 꿈꾸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고 한 해가 다 가도록 여전히 나는 쉬는 타령 중이다. 스스로를 옥죈 탓이다. 다 특유의 신경질적인 완벽주의 때문이라고 한발 물러나도 소용없다. 평소 워커홀릭은 과시욕이나 탐욕, 집착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누구 탓도 아니다.

게으른 몸을 일으켜 느릿느릿 움직이고,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어 가슴을 열고 영혼을 깨우는 여유를 며칠이나 가졌을까. 눈동자가 탁해지고 언어가 가벼워지고 영혼이 앓는다. 뇌의 표피에 머무는 기억은, 말 그대로 표면적이다(과학적으로도 휴식, 수면을 통해 장기기억 장치인 해마에 저장되지 못하는 기억은 언제나 순간에 머물 수밖에 없다). 깊이가 있을 수 없다. 얕고 부박하다. 영혼을 쉬게 하지 못하면, 사람은 살 수 없다. 

# 두아미시-수쿠아미시 지역에 살던 인디언의 추장 시애틀은 미국 정부가 땅을 사들이려고 하자 맑은 대기와 찬란한 물빛은 우리 것이 아닌데 그걸 어떻게 사겠다는 것이냐는 명답을 했다고 한다. 다음 글은 추장의 편지 중 일부라는 주장과, 시나리오 작가인 Ted Perry의 창작품이라는 주장으로 나뉜다. 나로서는 진위를 헤아릴 길이 없지만 누구의 것이든 담고 있는 뜻을 좇아 여기 옮겨본다. 새해엔 ‘연못 위를 달려가는 바람소리’를 담을 줄 아는 눈과 귀와 영혼이 회복되기를 바라며.

“(백인의) 도시에는 조용한 곳이 없다. 새 잎 날리는 소리나 벌레들의 날개 부딪치는 소리를 들을 곳이 없다. 붉은 인간(인디언)이 미개하고 무지하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도시의 소음은 귀를 모욕하는 것만 같다. 쏙독새의 외로운 울음소리나 한밤중 못가에서 들리는 개구리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면 삶에는 무엇이 남겠는가. 나는 붉은 인간이라서 이해할 수가 없다. 인디언은 연못 위를 쏜살같이 달려가는 부드러운 바람소리와 한낮의 비에 씻긴 바람이 머금은 소나무 향기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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