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열며-믿음에 대하여
아침을열며-믿음에 대하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7.28 18:44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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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믿음에 대하여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 많이 듣던 이야기다. 최근에 나는 출판사에서 의뢰받은 철학에세이 한권을 번역했는데 그 주제가 ‘사랑과 거짓말’인지라 작업하는 내내 이 명제가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우리 인간에게, 심지어 사랑에 있어서도, 거짓말이라는 게 얼마나 보편적인 현상인지를, 그것이 거의 진리의 일부임을, 이 책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그런데, 아주 유명한 것은 아니지만, 실은 저 공자에게도 ‘믿음’(信)이라는 것은 중요한 주제의 하나였다. {논에}에 보면, 그는 여러 차례 이 말을 입에 담는다.

…敬事而信,節用而愛人, 使民以時(1/5), 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而親仁,….(1/6), …主忠信. 無友不如己者.過則勿憚改(1/8),(9/24),(일부12/10) 人而無信,不知其可也.大車無輗, 小車無軏, 其何以行之哉?(2/22), …老者安之, 朋友信之, 少者懷之(5/26), 子以四敎, 文行忠信(7/26), 狂而不直,侗而不愿, 悾悾而不信,吾不知之矣.(8/17), …足食, 足兵, 民信之矣.子貢曰;必不得已而去, 於斯三者何先?曰;去兵. 子貢曰;必不得已而去, 於斯二者何先? 曰;去食.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12/7), …上好信則民莫敢不用情…(13/4), …言必信…(13/20), 言忠信,行篤敬(15/6), 君子義以爲質, 禮以行之, 孫以出之, 信以成之, 君子哉!(15/8), 能行五者於天下,爲仁矣.[…]恭寬信敏惠.恭則不侮, 寬則得衆, 信則人任焉,敏則有功,惠則足以使人(17/6)

이른바 ‘인의예지’니 ‘충효’니 그런 것에 가려서 그렇지 이렇게 늘어놓고 보면 ‘信’이라는 것이 그에 못지않은 공자의 가치개념이라는 게 한눈에 들어온다.

그렇다면 공자는 왜 이렇게까지 ‘믿음’이라는 것을 강조했을까. 너무나 간단하다. 사람들에게 그 ‘믿음’이라는 것이 없었고 그게 문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공자는 철저하게 ‘문제’로부터 철학을 했던 사람이다. 사람이, 그 말이, 그 행동이, 그 삶이, 도통 ‘미덥지 않다’는, ‘믿을 수 없다’는, 그래서 ‘믿지 못한다’는, 그런 가슴 아픈 문제적 현실이 공자 앞에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인간들이 오죽했으면 공자가 이렇게까지 ‘믿음’을 강조했을까. 좀 딱한 생각이 들 지경이다.

그로부터 무려 2천 수 백년이 흘렀다. 그럼 지금은 뭐가 좀 나아졌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보면 공자 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전혀 나아진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저 {사랑과 거짓말}이 보여주는 일상적-개인적인 거짓말들은 그렇다 치자. 적어도 공적인 관계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믿어야 할 텐데, 믿을 수 있어야 할 텐데, 요즘 같아서야 순진하게 믿는 사람은 오히려 바보로 치부된다. 각종 선거 때마다 후보들이 외치는 약속들은 판이 끝나자마자 어디론가 슬그머니 사라진다. 내 가까운 후배 중에 이른바 ‘메니페스토 실천운동’을 수년간 사명감으로 수행해온 친구가 있는데, 그를 통해 나는 그 허실을 여실히 전해들은 바가 있다. 대부분 엉터리라는 것이다. 정부의 정책들도 마찬가지다. 발표되는 그걸 그대로 믿고 뭘 기대했다가는 거의 뒤통수를 맞게 된다. 큰 코를 다치게 된다. 정치는 물론, 요즘 사람들은 경찰이나 검찰도 믿지 않고, 심지어 사법부의 판결조차도 신뢰하지 않는다.(무전유죄, 유전무죄!) 그럼 언론은? 교육은? ... 묻는 것 자체가 어리석다. 국제관계인들 뭐가 좀 다를까? 우리는 미국이나 중국을 믿어도 되는 걸까? 그러고도 싶지만, 미국은 얄미운 일본을 너무 챙기고 중국은 위험한 북한을 너무 감싼다. 우리의 미래를 의지할 나라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알아서 나라를 지켜야 한다.

‘세상’이란 게 애당초 그런 것인가…. ‘믿을 건 너 자신밖에 없다’거나 ‘믿을 건 돈밖에 없다’거나 하는 세간의 저 충고들이 묘한 무게로 가슴에 와 닿기도 한다. 그 틈바구니에서 종교산업은 날로 번창한다. 거기엔 불황도 없다. 경제가 불황일수록 오히려 교회나 사찰은 호황을 누린다. 물론 그런 것들은 기본적으로 좋은 것이고 필요한 것이다. 큰 역할을 한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호화로운 그 말잔치에 과연 예수의 자리와 부처의 자리가 있기나 한 건지 고개가 갸우뚱해 질 때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런 경우라면 함부로 믿을 수도 없다. 내 주변의 적지 않은 성직자들도 그런 종교의 세속화를 우려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찌해야 할까.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 ‘아무것도 믿지 말라’, 라는 ‘회의주의’가 최종적인 답일까? 그럴 수만도 없다. 우리는 어떻게든 믿음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문맥은 좀 다르지만, 저 예수를 본받아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고 믿음 자체에 대한 깃발을 곧추세워야 한다. 먼저 그 가치를 일깨워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저 공자를 본받아 거듭거듭 그 가치를 강조하고 실천해 보여야 하는 것이다. 때로는 믿을 수 없음에 대한 지탄도 분개도 필요하다.

믿음의 기본은 말의 신뢰성이다. 모든 것은 말에서 시작된다. (‘信’이라는 글자 자체가 ‘사람 인’ 변에 ‘말씀 언’자로 되어 있다. 모름지기 사람의 말은 믿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겠다.) 한 마디의 말도 함부로 내뱉지 않으려는 자세,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려는 자세, 그런 치열한 내적 노력 없이 ‘믿음’은 결코 확보되지 않는다. ‘남아일언중천금’ 같은 해묵은 말도 다시 꺼내 먼지를 털고 때를 닦아 사람들 입에 올려놔야 한다. ‘중천금’은커녕, 지금 사람들의 말은 깃털보다도 더 가볍다.

나는 믿고 싶다. 간절하게 믿고 싶다. 그러나 믿을 수가 없다. 역시 문맥은 좀 다르지만, “나는 믿는다…”(credo) 라고 단호하게 말했던 중세의 저 테르툴리아누스와 안셀무스가 부러울 뿐이다. ‘믿을 신(信) 자여, 그대는 지금 어느 구석에서 초라한 몰골로 그 가련한 신세를 한탄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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