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열며-즐거움에 대하여
아침을열며-즐거움에 대하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8.11 19:26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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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즐거움에 대하여

“요즘 사는 게 별 낙(樂)이 없다”

한 친구가 투덜거렸다. 집에서는 자식과 마누라가 걱정을 끼치고, 하는 사업도 불경기로 영 재미가 없고, 나라꼴도 엉망진창이고…. 하기야 뭐, 사는 게 대개 그렇지. 그 친구의 투덜거림이 십분 이해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데 어쩌면 오히려 그래서 그런지, 주변의 동료들을 둘러보면 다들 하나씩 재미거리를 찾아 나름대로 거기서 즐거움을 느끼려고 안달인 것 같다. 좀 여유있는 누구는 해외여행을 다니고, 누구는 텃밭을 가꾸고, 누구는 뒤늦게 기타를 배우고, 누구는 합창을 하고, 누구는 산수화를 그리고, 또 누구는 외국어를 배우고, 또 누구는 마누라와 함께 드라마를 본다. 그런 게 이 거칠고 힘든 세상살이-인생살이에서 그나마 작은 구원이 되어주는 것도 사실인 것 같다.

나도 그런 점을 잘 아는지라 젊은 학생들에게 ‘인생론’을 강의할 때, 특히 ‘희로애락’을 강의할 때, 이 ‘즐거움’ 내지 ‘즐김’을 하나의 테마로 다루기도 한다. 이른바 ‘취미생활’이나 ‘문화생활’도 그런 범주에 들어간다.

별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렇다 할 취미가 별로 없다. 일하는 것, 글쓰는 것, 걷는 것, 티비시청이 즐거움이라고 하면 누군가의 눈총을 받을 지도 모르겠다. 이쯤에서 꼭 참고할 것이 하나 있다. 공자의 경우다. 나는 요즘 공자를 다시 읽는 것이 큰 즐거움인데, 이 양반이 (좀 뜻밖에도) ‘즐거움 내지 즐김’(樂)이라는 것을 자주 입에 올린다. 그런데 요즘의 세태에 비추어보면 그 내용이 좀 특이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0101벗이 있어 먼데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않으냐)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0115가난하고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고도 교만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괜찮다. [그러나] 가난하고도 즐겁고 부유하고도 예를 좋아하는 이만은 아직 못하다) “賢哉, 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0611한 그릇의 밥과 한 쪽박의 물만 가지고 누추한 거리에 살면 여느 사람이라면 그 걱정을 견지지 못할 텐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으니. 훌륭하구나. 회는!)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0620이를 아는 이는 이를 좋아하는 이만 못하고 이를 좋아하는 이는 이를 즐기는 이만 못하다) “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0623아는 이는 물을 즐기고 어진 이는 산을 즐긴다…아는 이는 즐겁고 어진 이는 수한다) “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0716거친 음식을 먹고 물마시고 팔베개를 하고 눕더라도 즐거움이 역시 그 가운데에 있다. 의롭지 않게 누리는 부귀는 내게는 뜬구름과 같다) 葉公問孔子於子路, 子路不對. 子曰, “女奚不曰, 其爲人也, 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云爾”(0719너는 왜 그[공자]의 사람됨이 발분하면 먹는 것을 잊고 즐거움으로써 근심을 잊으며 장차 늙음이 오리라는 것도 모르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益者三樂, 損者三樂. 樂節禮樂, 樂道人之善, 樂多賢友, 益矣. 樂驕樂, 樂佚遊, 樂晏樂, 損矣”(1605이로운 세 즐거움이 있고 해로운 세 즐거움이 있다. 예악을 적절히 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남의 선을 이끄는 것을 즐거워하며 훌륭한 벗을 많이 사귀는 것을 즐거워하면 이롭고, 교만을 즐거워하고 질탕하게 노는 것을 즐거워하며 잔치를 즐거워하면 해롭다)

어떤가? 이만하면 하나의 이론이라고 해도 혹은 하나의 철학적 입장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즐거움 내지 즐김은 그에게 하나의 큰 가치였다. 그것은 ‘아는’ 것보다도, ‘좋아하는’ 것보다도 더 큰 가치였다. 그것은 ‘근심을 잊게 해주는’ 가치였다. 이 사람은 확실히 뭔가를 아는 철학자다. 그런 게 한두 개가 아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이 ‘즐거움론’에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즐거움이 경제적-사회적 조건(빈부귀천)을 초월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게 어디 쉬운 일인가. 빈천하고도 즐거울 수 있는 사람은 요즘 같으면 거의 없다. 그러나 공자는 자신의 그런 소신을 떳떳이 밝히고 또 실제로 그랬던 제자 안회를 칭찬하고 있다. 더욱이 그는 ‘不義’(불의)로 그런 처지를 벗어나려는 데 대해 단호히 반대했다. 그건 그의 지론이었다. 빈천 속에서도 즐거울 수 있는 마음의 여유! 그게 공자와 안회의 인품이었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그의 즐거움은 무엇일까. 많지 않은 언급 중의 하나가 ‘유붕자원방래’다. 그는 ‘벗이 있어 먼데서 찾아오는 것’을 즐거움의 하나로 꼽고 있다.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이건 정말이지 큰 즐거움이다. 그런데 요즘은 제대로 벗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도 아예 쉽지가 않고, 더군다나 그가 ‘찾아온다’고 하는 이 당연한 현상도 세태로 인해 점점 드물어져 간다. 또 다른 예가 ‘樂水, 樂山’(요산, 요수) 즉 산을 즐기고 물을 즐기는 것이다. 요즘 같으면 ‘자연’을 즐기는 것이다. 이건 건강만 하면 얼마든지 즐길 수가 있다. 돈도 안 든다. 그런데 요즘 같으면 이것조차도 쉽지가 않다. 가까운 물(강과 바다) 그리고 산들은 오염이나 개발로 엉망이 되어 간다. 16장의 저 언급은 더욱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그가 ‘이롭다’고 말한 ‘節禮樂’(절예악)의 즐거움, ‘道人之善’(도인지선)의 즐거움, ‘多賢友’(다현우)의 즐거움, ‘예악을 적절히 함’ ‘남의 선을 이끎’ ‘훌륭한 벗을 많이 사귐’, 그런 것이 요즘 과연 있기나 한가. 반면 ‘교만함’의 즐거움, ‘질탕하게 노는 것’의 즐거움, ‘파티’의 즐거움, 공자가 ‘해롭다’고 말한 그런 즐거움들은 지금도 세상에 넘쳐난다.

즐거움은 많다. 그러나 즐거움에도 종류가 있고 질이 있다. 수준이 있다. 우리는 한 인간으로서 즐길 수 있고 또 즐겨야 한다. 그것은 권리이자 의무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즐기는가 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의 과제로서 우리 앞에 버티고 있다. 각자의 즐거움을 한번 점검해보자. 그리고 물어보자. “너는 도대체 무엇이 즐거운가?” “너는 도대체 어떤 인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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