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경남의 여성 항일투사
진주성-경남의 여성 항일투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8.17 19:12
  • 14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실장
 

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실장-경남의 여성 항일투사


경남을 대표하는 여성 항일투사 중 가장 으뜸이 되는 분은 당연히 의기 산홍(山紅)이다. 내년 3월 정부포상을 기대하지만 을사오적 가운데 하나인 이지용이 천금을 주면서 첩이 되어 달라고 했으나 단호하게 거절하며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을사오적이라고 하는데 사람답게 살려는 나는 거절합니다”라고 말했다. 서울에서 또 만나자 보석·반지를 주면서 술에 취해 공갈 협박하자 견디지 못하게 될 정도가 되었고 맞아 죽는 것 보다 스스로 죽겠다 라고 말하고 자결하니 순국자 반열에 들었다.

양회갑 선생의 문집 <양재집>에 스스로 죽었다고 기록되었고 전 경상대 교수 김수업 교수가 쓴 <논개> 책에서도 스스로 자결 순국했음을 증명했다.

경남 마산 출신 최봉선(崔鳳善)선생은 1919년 3월 21일 의신학교에서 김남준. 이수학. 안음전 등과 함께 결사단을 조직해 태극기와 격문을 만들고 창신학교 학생들과 장터에서 3천 여명을 모아 시위를 전개할 때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27년 3월에는 친일파 김기정의 매국 발언에 대하여 성토하고 3월 12일에는 시민대회를 개최해 격문을 배포하는 등 활동하다 체포되었다. 다음해 1928년 12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죄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았으나 실제적으로 1년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경남 고성군 하이면 출신 이금복(李今福)선생은 1932년 부산 초장동 방직공장에 취업해 이춘근. 김병환. 정충조 등과 공장연구회를 조직해 활동하고 <여공과 더불어>라는 전단지를 살포하다 일경에 피체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혼절했다. 이금복 선생은 1938년 고성군 하이면에서 용산독서회를 조직해 활동하고 삼천포노동조합을 조직해 야학을 개설하는 등 활동하다 또 체포되어 진주지법에서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2000년 98세 때 세상을 떠나자 후손들이 성금을 모아 고성군 바다가 잘 보이는 장소에 공적비를 세우면서 필자가 비문을 지었다.

또 통영군에는 기생들 정막래. 이소선 등이 3.1만세 운동을 주도하다 마산감옥에서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진주 기생들 7.8명이 논개 정신을 이어간다면서 남강변을 따라 만세운동을 전개하다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으나 제판기록을 찾을 수 없다. 일제시대 여성들도 항일투쟁과 교육사업에 앞장 서는 등 활동했으나 지금까지 미온적. 소극적으로 대처한 정부는 지금이라도 앞장 서서 발굴에 다함께 동참해 주기를 호소·탄원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