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추증 참판 허국주(許國柱)선생
진주성-추증 참판 허국주(許國柱)선생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8.31 18:43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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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실장
 

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실장-추증 참판 허국주(許國柱)선생


임진공신 허국주(1548~1608)선생께 추증직 참판 벼슬이 내린 것은 큰 공이 있다는 뜻이다.

자는 중간(仲幹)이며 고려 말 휘 옹(邕)은 벼슬이 전리판서 겸 예문관제학이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산청 단성면 법물리에 은둔하게 된다. 옹의 소생 소유는 공민왕 때 감찰장령이었으나 직간하다 좌천되었다. 모친상을 당했을 때 왜구가 침입하여도 여막을 떠나지 않으니 그 효성에 감동하여 주위 수 십리 길에서 범접하지 못했다고 전해 온다.

3대를 내려와 추(錘)는 유일로 천거되어 참봉을 제수받았으나 벼슬하지 않았다. 조부 공작(公綽)은 음사로 통훈대부 삼가현감이요. 부친 유(裕)는 부호군 통례원 좌통례이다. 모친은 숙인 함종 어씨로 진사의 딸이다.
승정원 부승지겸 경연참찬관 진성 이만도(李晩燾) 선생이 지은 신도비명과 사헌부 대사헌 시강원 참선 은진 송병준이 지은 묘갈명을 근거로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허국주 선생은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지극했으며 지조와 기개가 탁월했다. 손자의 병법을 흠모하더니 무예로 천거되었다. 몇 년 후 임진왜란을 당하여 김성일 선생이 본도의 초유사로 부인하니 공은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재물을 내고 군대를 모집하여 무리가 육칠백인에 이르자 규율을 엄하게 하고 대오를 정비하여 적과 함께 죽을 각오를 하였다. 허국주 선생은 정유경과 함께 복병장이 되었다. 초유사가 말하기를 진양이 없으면 호남이 없다고 하자 공은 한결같이 초유사의 지시를 따르고 일에 따라 책략을 세워 진을 임하며 선봉이 되고 대치하면 복병이 되더니 정유경과 더불어 남강 밖에서 분탕질 하던 적을 습격하여 목을 벰이 많았다.

이로 인해 승진하여 본도 병마우후사가 되었고 그 후 선무원종 삼등공훈에 기록되었으나 공은 자랑하지 않았다.

물러나 지수 염창강가 절벽위에 정자를 지어 관란(觀瀾)이라 편액하고 당대의 명사들과 시를 읊으니 세상 사람들이 기로계 11현이라 했다.

서기 1608년 무신 3월 29일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61세이다. 통훈대부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진주 동쪽 용봉리 청원 묘좌 언덕에 있다. 일남 삼녀를 두었다.

충효를 겸전하였고 충의로서 싸우니 가는 곳마다 승전하였고 복병을 설치하여 적을 참수함이 또한 많았음이 또 다시 알려지자 목사의 보고와 도백의 장계로 주상이 증직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훈련원 도정을 더하라 명하고 숙부인은 정부인이 되었다.

지수면 청담리 관란정을 경남도 문화재로 신청해 심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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