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항일투사 영화감독 나운규 선생
진주성-항일투사 영화감독 나운규 선생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9.28 19:15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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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실장
 

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실장-항일투사 영화감독 나운규 선생


2016년 10월 국가보훈처는 이 달의 항일독립투사로 영화감독인 나운규(羅雲奎)선생을 선정해 각종 기념사업을 펼친다.

나운규(1902~1937)선생에 대하여 영화감독으로 알고 있을 뿐 독립군·항일투사에 대하여 생소하다고 말한다.
1926년 10월 1일 서울 단성사에서 첫 개봉된 흑백 무성영화 <아리랑>영화가 상영된 다음 관중들이 떨쳐 일어나 아리랑을 불렀고 점차 전국으로 상영권이 전파돼 큰 파장을 일으켰다는 기록이 있다.

아리랑 영화의 각본·감독·출연 1인 3역은 감당함으로서 큰 파란과 감흥을 가져왔다.

나운규 선생은 조선 말기 중사로 전역하고 약종상을 경영한 나형권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신흥학교 고등과를 거쳐 북간도로 건너가 공부할 때 3.1운동에 참여하고 북간도 거주민들이 창설한 대한국민회(간도국민회)에 가입했고 회령~청진간 철로를 폭파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회청간 폭파 미수사건으로 일제에 체포되어 2년 징역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지방 순회 공연의 신국단 예림회에 가입해 동갑 향리친구 안종화 등과 부산으로 내려가 조선키네마 창립에 관여했다.

‘심청전’, ‘새장속의 새’, ‘풍운아’ 등에 출연하고 1927년 윤봉춘·이범래·김용국 등과 함께 나운규프로덕션을 설립해 ‘옥녀’, ‘사나이’, ‘사랑을 찾아서’ 등을 만들고 최초의 문예 영화인 ‘벙어리 삼룡이’를 제작했다. 이어 ‘아리랑 후편’, ‘철인도’, ‘개화랑이문’ 등을 만들었다.

아리랑 3편을 만들 때부터 변사시대를 벗어나 최초의 무성영화시대를 열었다.

1937년 이태준의 소설 ‘오몽녀(五夢女)’를 경성촬영소에서 영화로 만들어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과로가 겹쳐 폐결핵으로 요절했다.

나운규 선생은 ‘홍길동’ 외 28편의 작품을 남기고 27편의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고 각본·감독한 작품도 18편이 넘는다.

나운규 선생의 아리랑이 서울에서 성공한 이후 전국으로 확산되고 평양상영 때 대들보가 부러질 정도로 구름 같은 인파가 운집했다는 기록이 있다.

일제는 아리랑의 성공을 보고 긴급 대책을 강구했으나 전국적인 감흥을 일으킨 아리랑에 대하여 감히 통제하지 못했다.

정부는 나운규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3.1운동, 독립군 활동, 옥중고생을 함께 겪었던 동갑 윤봉춘(尹逢春)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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