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해양의병장 추기엽(秋琪燁)장군
진주성-해양의병장 추기엽(秋琪燁)장군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10.05 18:37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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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실장
 

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실장-해양의병장 추기엽(秋琪燁)장군


추기엽(1879~1909)장군은 조선 말기 나라가 풍전등화로 위급할 때 의병전쟁의 주역으로 해상·해양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한 창의 대장이다.

추기엽 장군은 조선 왕궁을 지키는 친위대 제1대대 소속 장교로 근무했고 진위보병 제1대대 장교인 부위·정위·참령을 거쳐 정3품 통정대부 시위연대 향관으로 활약했다.

군대가 해산될 때 외지에 있었으나 곧 긴급 투입되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일단 물러났다.

추기엽 장군은 애국애향심이 투철했기 때문에 모든 직위를 내려놓고 윤현보·이봉오 등과 함께 전북으로 건너갔다.

의병 활동 중 음력설을 맞아 잠시 고향으로 가던 중 일제에 발각.체포되어 1908년 3월 전북 재판소에서 유향(귀양살이)10년형을 언도받고 완도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황준성·이봉오 등과 함께 탈출해 해남군 송지면 대둔사에 들어가 의병을 모집하고 호남창의대장으로 추대되었다.

1908년 6월부터 해남·강진·완도·영암 일대에서 450여명의 의병을 모아 일본군과 40여 차례 크고 작은 전투를 전개해 큰 전공을 세웠다.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승정원 일기>, <일성록> 등에 활동상이 기록되었고 <독립유공자공훈록> 제9권에 기록된 공적에 의하면

“1907년 9월경 이봉오·윤현보·황준성 등과 함께 활동하다 일제에 체포되었다. 1908년 3월 3일 유형(流刑) 10년형을 받고 완도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탈출한 추장군은 해남·영암 일원에서 의병을 모집해 황준성이 대둔사에서, 황두일은 대흥사에서, 추장군은 미황사에서 각각 수백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활동했다. 1908년 8월부터 해남 등 해변을 중심으로 40여 차례 활동했다”

장보고 이후 남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왕래 선박을 일일이 감시·통제했고 일제 선박을 침몰시킨 쾌거를 이루었다,

1909년 7월 대둔사 전투에서 다수의 의병들이 전사하자 책임소재로 다투다가 남창 해변가에서 부하 6명에게 암살당해 순국했다.

추기엽 장군의 공적은 그 당시 <관보> 4041호에 기록되었고 <명치백년사 총서>, <한국독립운동사 자료집>(국사편찬위), <한민족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 <고종시대사>(국사편찬위), 의병토벌지(일제측 기록), 또 궁중 기록인 <규장각 일기> 등에 등재되어 공적이 확실하다.

정부는 추기엽 장군의 공적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후손은 근호·규호(조선대 교수)·충호·봉호·동호(사무관)가 있고 장손은 연삼(인성고 교사)·연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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