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열며-시베리아에서
아침을열며-시베리아에서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10.10 18:18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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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시베리아에서


참 세월 좋아졌다. 어쩌다보니 시베리아에 왔다. 이르쿠츠크를 거쳐 바이칼호의 올혼섬에서 저녁을 맞는다. 한세월 전만해도 언감생심 꿈도 못 꾸던 러시아 땅이다. 러시아문학을 전공한 친구가 있는 터라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또 어릴 적부터 ‘닥터 지바고’를 워낙 좋아해서 시베리아는 아련한 동경의 땅이기도 했다. 실망은 없었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과 타이가의 숲. 그건 한국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대지’라는 말을 실감케 했다. 창밖으론 지금 쏟아질 것 같은 별들도 한 가득 눈에 들어온다. ‘하늘’이라는, ‘우주’라는 말도 여기서는 실감이 난다.

도대체 무엇이 나를 이토록 설레게 하고, 들뜨게 하는 걸까. 도대체 무엇이 이토록 신선한 느낌을 주는 걸까. 어쩌면 이 광활함, 단순함, 청결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저 전나무와 자작나무들의 때맞춘 진노랑 단풍은 덤일 것이다. 적어도 나의 감각에는 이 시베리아가 너무나 아름답다. 이르쿠츠크에서 잠시 목격했던 저 러시아 특유의 건축물들, 특히 그 양파모양의 지붕들도 거기에 한 몫 한다. 예쁜 목조 주택과 통나무집들도 빠질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것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아주 자연스럽게, 떠나온 저 한국이 이곳과 대비된다. 저기 남쪽엔 우리의 너무나 복잡한 삶이 있다. 너무나 치열한 삶이 있다. 그 동안 우리는 정말 너무나 정신없이 살아왔고 지금도 여전히 너무나 정신없이 살고 있다. 불과 한 세기 전 우리는 못난 조상들 때문에 일본에게 나라를 잃었었고 수탈, 징병, 징용, 위안부...그리고 독립투쟁 등 엄청난 희생을 치르며 그 치욕의 역사를 통과했다. 미국 덕분에 간신히 독립을 얻었지만 곧바로 조국은 분단됐고 말도 안 되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렀다.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비극만을 남긴 채 아무것도 얻은 것 없이 전쟁은 원점으로 되돌아가 끝이 났다. 우리는 그 전쟁의 폐허 위에서 죽기살기로 몸부림쳤다. 그 과정에서 저 419 516 1026 1212 518 629 등도 경험했다. 그 과정에서 말할 수 없는 희생이 제물로 바쳐졌다. 참으로 아픈 역사가 아닐 수 없다. 그 와중에서 우리는 올림픽과 월드컵도 치러냈고 착실히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도 했고 이른바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제적 발전도 이룩했다. 세계 최빈국에서 선진국의 문턱에까지 도달한 것이다. 말이 그렇지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중에서도 몇몇 분야는 세계최고를 자랑하기도 한다. 이곳 이르쿠츠크의 최고급 쇼핑몰에도 ‘삼성’은 자랑스럽게 그 한칸을 차지하고 있었고 거리엔 현대를 비롯한 한국차들이 역시 자랑스럽게 거리를 질주하고 있었다. 정말로 우리는 엄청난 것들을 이루며 정신없이 달려온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우리는 또한 많은 것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자연’이다. 이른바 개발의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들판을 잃어버렸고, 산도 잘려나갔고 개펄도 사라졌다. 강과 바다의 물도 당연히 더러워졌다.(우리 집 앞의 한강과 이곳 앙가라강의 물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바이칼의 물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림같이 아름다웠던 백사장들도 점점 구경하기가 어려워져 간다. 도시의 숲들은 아직도 턱없이 모자란다.

그리고 또 잃어버린 것이 ‘사람’이다. 아니, 사람이 왜? 라고 이의를 제기할지 모르겠지만,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아닌 것이다. 거리를 오가는 우리의 눈빛을 보고 표정을 보라. 우리는 지쳐 있거나 화나 있거나 실망해 있다. 좀 살벌하다. 거기에 조금 성취한 자들은 오만하기가 이를 데 없다. 갑질은 도처에서 횡행한다. 부정과 부패도 넘쳐난다. 좀 과장하자면 그건 사람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숨 막히는 경쟁의 과정에서 우리는 사람으로서의 순박함을, 그리고 인간다움을 내다버린 것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그 많은 것들이 이곳 시베리아에는 아직도 좀 남아 있다. 자연은 깨끗하고 사람은 순박하다. 거기다 크기까지 하다. 이것을 우리는 거울로 삼자. 잃어버린 과거를 비쳐보는 거울로 말이다.

누구에게나 쉽게 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살다가 한번쯤은 이곳 시베리아에 와서 그 동안의 치열함을 잠시 잊고서, 그 살벌한 표정도 벗어놓고서, 맛있는 보르쉬(Борщ) 스프라도 먹으며 잃어버렸던 인간의 미소를 되찾아보자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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