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지리산 속 역사의 헌적들(1)
진주성-지리산 속 역사의 헌적들(1)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10.11 18:37
  • 14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지리산 속 역사의 헌적들(1)


지리산은 이중환(李重煥 1690-?) 택리지 팔도 총론에서 “지리산은 배두산의 큰줄기가 다한 곳이다” 그래서 두류산이라 한다고 했다. 전체면적 1,000㎢ 동서길이100km 남북40km이다.

고려 문인 이인로(李仁老 1152-1220)는 파한집에서 지리산은 처음 북조 백두산에서 시작 꽃같은 봉우리와 꽃받침같은 골짜기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고 말하고 아름다운 형승(形勝)에 반해 시를 읊었다. “두류산은 높고 저녁구름 낮으니 / 만학천암이 회계산과 같도다...”하였고 문수보살은 일만 문수신을 나타내어 중생을 교화함으로써 문수대성의 지혜로운 이인(異人)이 많이 나타나게 했다는 뜻에서 지리산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신라말 태조 왕건의 어머니가 지리산신에게 빌어 고려를 일으켜 세우게 돼 그를 기려 세운 석상(石像)이 성모상이다.

조선조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8)가 일찍이 기도를 드렸는데 꿈에 지리산신이 나타나 도와주어 구례당촌에 남악사(南嶽祠)를 지어 해마다 제사 지내게했다.

지리산 삼봉(천왕봉, 반야봉, 노고단) 가운데 조봉이 되는 고로 남악사를 지어 산신제를 올렸던 “산왕지위(山王之位)”의 돌비가 남아있다. 노고단 산제는 남원부사가 지내오다 산림이 울창하여 호식(虎食)이 두려워 중단하고 구례군 광의면 탄동 뒷산 구봉에서 산제를 지내오고 있다.

1962년 지리산 약수제로 개명 곡우일에 전남 도지사 주관으로 화엄사에서 지낸다. 일찍이 대각국사는 화엄사를 감싼 노고단 산세를 보고 세속의 더러움을 끊을 수 있는 정토(淨土)로 보았다.

“적멸당 앞의 빼어난 경치는 많기도 해라 / 길상봉에서는 섬애(세속의 더러움)도 끊긴다네” 그러나 똑같은 화엄사를 두고 서산대사는 대각국사와 달리 제해무상으로 보았다. 빼어난 선경은 오히려 두려움이요. 번계소집성을 벗어버린 사물본체로의 마음인 것이다. “산촌에 해 떨어지니 / 가을 풀 구룡(九龍)으로 누웠네 / 고전(古殿)은 달빛을 조문(弔問)하고...” 서산대사 화엄사는 차산(茶産)의 본향(本鄕)이다. 인도스님 연기조사가 화엄사를 지을 때 차(茶)종자를 가져와 심었다한다. 십리길 장죽전(長竹田)을 이루는데 죽로차(竹露茶)란 이름으로 우리나라 차향(茶鄕)이 되었다. 화엄사 봉천암은 차향의 맥을 이어 왔던 곳 그곳 석천기(石泉記)에 적혀 있다.

“눈물로 달인 차는 천상의 맛이요 / 계수나무 꽃으로 빚은 술은 달 가운데 향기롭네” 선친 만우 정병헌 차시이다.

지리산 차에 관한 이야기는 차에 본향은 쌍계사로 신라 성덕왕때 혜조스님이 지은 절이다. 고운 최치원 선생이 쓴 진감선사 비문 서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있다.

“동국의 화계동은 병속의 별천지 / 선인이 옥베개 밑에 잠에서 깨어보니 / 이 몸은 흘연이 천년을 지났네” 최치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