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冬至) 이야기
동지(冬至) 이야기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1.12.21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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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 상봉동동 문화위원
일년 중에서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날을 동지라 부르고 동지가 속한 월을 동짓달이라고 달리 부르기도 한다.

이처럼 낮과 밤의 시간변화에 사람들은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동짓달을 아세(亞歲)라 했고 민간에서는 흔히 작은설이라고 불렀다고 적고 있다. 태양의 부활을 뜻하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설 다음가는 대접을 받은 것이다. 그 유풍(流風)은 오늘날에도 여전해서 동지를 지나야 한 살 더 먹는다. 또는 동지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말도 있다. 위와 같은 의미는 일찍이 중국에서도 보인다. 중국 주나라에서도 동지를 생명력과 광명의 부활이라고 생각하여 설로 삼았으며 천지신과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다.

농가월영가(農家月令歌) 11월조에서는 동지(冬至)는 명일(名日)이라 일양(一陽)이 생(生)하도다. 시식(時食)으로 팥죽을 쑤어 인리(隣里)과 즐기리라. 새 책력반포(冊曆頒布)하니 내년절후(來年節侯)어떠한고, 해 짧아 덧이 없고 밤 길기 지루하다라고 노래하였다.

동짓날하면 누구나 팥죽을 생각할 것이다. 이날 먹은 팥죽을 동지두죽 동지시식(冬至豆粥 冬至時食)이라 부르는데 팥을 고아 죽을 만들고 여기에 찹쌀로 단자(團子)를 만들어 넣어 끓여 먹었다.

단자는 새알크기로 만들기에 새알심이라 부른다. 팥죽을 다 만들면 먼저 사당에 올리고 각방과 장독 헛간 등 집안의 여러 곳에 담아 놓았다가 식은 다음에 식구들이 모여서 먹는다.

이렇듯 팥죽은 시절식(時節食)의 하나이면서 신앙적인 뜻을 지니고 있다. 즉 팥죽에는 축귀(逐鬼)하는 기능이 있다고 보아 집안의 여러 곳에 놓았고, 이것은 집안에 있는 악귀를 모두 쫓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사당에 놓은 것인 천신(天神)의 뜻이 있다. 팥의 붉은색은 양색(陽色)이므로 음귀(陰鬼)를 쫓는데 효과가 있다고 믿었으며, 민속적으로 널리 활용(活用)되었다.

사람이 죽으면 팥죽을 쑤어 상가에 보내는 관습이 있는데 이는 상가에서 악귀를 쫓기 위한 것이며 동짓날 팥죽을 쑤어 사람이 드나드는 대문이나 문 근처의 벽에 뿌리는 것 역시 악귀를 쫓는 축귀 주술행위의 일종이다. 철 생선 대구를 사서 사당에 제를 올리기도 하였다.

동지는 보통 셋으로 구분하는데 동지가 12월 초순에 들면 애동지, 중순에 들면 중동지, 하순에 들면 노동지라 부른다. 이에 따라 노동지에는 늙은이가, 중동지에는 중늙은이가 그리고 애동지에는 어린아이가 많이 죽는다고 일렀다. 그런데 어린아이가 죽어서는 안된다고 여긴 나머지 애동지에는 팥죽을 쑤지 않았다. 한편 애동지가 드는 해는 겨울은 날씨가 춥고, 노동지인 경우에는 춥지 않다고 믿는다. 동짓날 날씨가 온화하면 다음해에 질병이 많아 사람이 죽는다고 하여, 눈이 많이 오고 날씨가 추우면 풍년이 들 징조라고  전한다.

동짓날에는 관상감(觀象監)에서 새해의 달력을 만들어 궁에 바치면 나라에서는 동문지보(同文之寶)라는 옥새를 찍어 백관(百官)에게 나누어 주었다. 동짓날이 부흥을 뜻하고 이날부터 태양이 점점 오래 머물게 되어 시간이 길어지므로 한해의 시작으로 보고 새달력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농경사회에서 책력(冊曆)은 생업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요긴하게 사용되었던 생활의 지침서였기 때문에 새해선물로서는 안성맞춤이였을 것이다.

동짓날에는 부적을 새기기도 하는데 보통 뱀사(蛇)자를 써서 벽이나 기둥에 거꾸로 붙이면 악귀가 들어오지 못한다고도 전해진다.

산업화 도시화라는 생활방식의 변화와 우리의 전통 식생활을 비롯한 주거시간개념 등 우리식의 사고체계 모두를 앗아가고 국적없는 겉 멋만 남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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