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진주대첩광장 여성공적 기리자
진주성-진주대첩광장 여성공적 기리자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10.12 18:23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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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실장
 

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실장-진주대첩광장 여성공적 기리자



새로 조성되는 진주대첩광장에 남성위주 또는 한, 두명의 인물만 기념하고 조형물을 세운다면 여성들은 매우 서운할 수 밖에 없다.

역사기록에 3800여 명이 왜적 3만여 명을 물리쳐 대승을 거두어 진주대첩이라고 하지만 그 절반인 1900명은 여성, 청소년들이다.

2차전의 6~8만명이 희생되었다고 하는데 순절 순국자 3~4만명은 분명히 여성과 청소년들이다. 즉 모든 희생의 절반은 여성이고 모든 공적의 절반은 여성이다. 진주대첩 1차 공적의 절반은 여성에게 있고 진주 2차 희생의 절반은 여성에게 있다.

이 같은 여성들의 쾌거를 기리기 위해 행주치마 동상과 기념탑비를 세워야 한다.

조경남 장군의 <난중잡록>제 3권 임진년 10월조에 의하면 “적들이 볼 때 군세가 왕성함을 보이게 하려고 작전의 일환으로 성내 전망이 좋은 곳에 용대기를 세우고 장막을 놓은 다음 성중의 사녀(士女)들과 아녀자(兒女子)들을 전원 남장(男裝)을 시켜 장정(壯丁)처럼 보이게 했다”라고 기록되었다.

선조 25년 상황을 기록한<조선왕조실록>1592년 10월조에 “화약을 싸서 풀로 묶어 성위에 감추게 했다”라고 대목에서 여성들의 역할을 나타낸다.

성내 여성들의 거주지에는 “가마솥을 비치하고 물을 끓여 대기토록 했고 장군부인. 현감부인. 판관부인. 훈도부인 등이 지도했다”고 기록했다.

또 적군들이 성벽을 오를 때 돌을 굴러 내리고 뜨거운 물을 퍼붓는 일과 부상병을 치료 위로하는 일은 여성들의 몫이었다. 돌을 손으로 운반하기 어려워 자연스럽게 행주치마. 인력거가 동원되었음이 확인된다.

<조선왕조실록>기록에 여성들의 역할이 엄청난 공격을 좌절시켰다는 대목은 매우 충격적인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진주성에는 남녀노소. 아녀자 등도 총동원되었음이 확실하다는 뜻이다. 진주성 전투인 10월 5일부터 10일 까지 6일간 남장한 부인들과 청소년들의 희생과 심리전이 매우 소중하고 위대했음을 알게 한다.

임진.계사 공신들에게 벼슬을 추증할 때 부인들에게도 역시 같은 직급의 벼슬(직첩)을 내렸다.

이것은 분명 진주대첩에서 세운 공적과 희생·순국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는 의미를 가진다. 생사고락을 함께했고 순절·순국한 여성·청소년의 공적도 반드시 기리고 선양돼야 하며 기념탑비가 필요함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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