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3.1만세운동과 진주정신
(1) 3.1만세운동과 진주정신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1.06.12 14:11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쁘다. 삼천 리 강산에 다시 무궁화 피누나.”

원암 장영주와 함께 하는 진주구경(晉州九景)


▲ 1919년 3월1일을 기해 전국에서는 독립만세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면서 전국이 태극기의 물결로 뒤덮였다. 진주에서는 1919년 3월18일과 3월19일 걸인과 기생들이 독립만세운동을 벌여 민족정신을 드날렸다.
진주는 세계 전쟁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대학살이 임진왜란 당시 빚어진 곳이라는 사실을 진주사람들도 잘 모르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에서는 7만명의 민관군이 왜병에 의해 모조리 도륙되는 전무후무한 참극이 빚어졌다.
 
김시민 장군과 논개, 남명 조식 선생의 효충도와 민족혼 정신은 면면이 흘러 형평운동과 개천예술제로 발현되면서 진주의 정신이 됐다. 그러나 지금 진주정신은 진주인에게서 조차 잊혀져 가고 있다. 이에 본보는 진주의 빛나는 정신을 알리고, 더욱 크게 전하면서, 전국의 여행객들을 진주로 끌어 모으기 위해 현재 국학원 원장인 원암 장영주 선생의 '진주구경(晉州九景)'을 연재한다. 에세이와 그림으로 이뤄진 장영주 원장의 글은 독자들에게 진주정신을 다시한번 되새기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편집자 주>

윤행임(尹行恁 1761∼1801, 정조 때 대사간)은 경상도민을 ‘태산교악 설중고송(泰山喬嶽 雪中孤松)’이라고 했다. 경상도인을 산악의 모습으로 바꾸고, 눈보라 속에서도 꿋꿋하게 홀로 견뎌내는 소나무의 품성에 비유한 것이다.
성호 이익(星湖 李瀷1681∼1763,영조 때 실학자)은 경상우도인(慶尙右道人)을 '낙선호의(樂善好義)‘라고 하니 즐겨서 착한 일을 하고 의(義)로운 일 하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예로부터 ‘조선 조정의 반은 경상도인이고, 그 반은 진주 인이다.’라는 말이 있다. 한국의 역사 속에서 진주는 이와 같이 범상치 않은 기상을 줄기차게 이어오고 있다.

강감찬 장군의 선조이신 고구려의 명장 강이식 장군은 진주강씨(晉州姜氏)의 시조로서 5만 명의 군사로 30만 명의 수(隨)나라 문제 양건을 패퇴시킨다. 대륙을 경영한 웅혼한 강이식 장군의 묘소는 만주 심양현 봉길선 원수림역 앞에 있고, 진주 시 봉산사에 영정이 모셔져 있어 매년 음력 3월 10일에 제향 한다. 아무리 강력한 수나라의 황제라도 고구려 명장의 주체정신(主體精神)을 넘어 설 수가 없었으니 지금까지 진주인의 품성 속으로 이어져 온 것이다.

 1592년 김시민 진주 목사는 군사 3,800여명으로 삼 만 여명의 왜군의 공격을 받아 6일간 싸워 물리치니 진주성 대첩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다음해 결국 진주성은 함락 되니 일본군의 전승연에 참석한 의기(義妓) 논개는 의암에서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뛰어들어 순절함으로써 민족의 꽃으로 산화하였다.

웅혼하고 엄격한 지리산을 닮은 남명 조식(南冥 曺植) 선생은 지행일치(知行一致)의 행동유학(行動儒學)을 실천함은 진정한 선비 상임을 주장하고 솔선하였다. 국사의 난맥(亂脈)을 보고는 죽음을 무릅쓰고 왕을 통박한 단성소(丹城疏)는 진주인의 호의정신(好義精神)을 상징한다.

의(義)를 기리고자 행동하는 정신은 유독 진주에서 꽃피우니 임술 농민항쟁(壬戌農民抗爭)과 조선사회에서 가장 차별받던 백정들의 인권과 존엄성을 살린 형평운동(衡平運動)이다. 특히 일제의 강권 통치 중에서 나보다 못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인권을 되찾아 주자는 우리나라 최초의 자율적이고 반차별 인권 운동인 형평운동은 지금의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에 부는 반독재 인권혁명의 원형인 것이다.

기미년 삼일만세운동은 조선총독부의 공식 집계만으로도, 106만 명이 참가하여 진압 과정에서 553명이 사망, 12,000명이 체포되었다. 시위 횟수만 1,542회, 사망자 7,509명 규모이니 당시 인구를 2천만 명으로 추정한다면 약 18명 중에 한사람이 참가, 노약자를 제외하면 온 국민이 거의 다 참가한 셈이다. 1,600명 중에 한 명이 체포되고, 약 2,600명중의 한 명의 국민이 목숨을 빼앗겼고 부상과 고문으로 몸을 상한사람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바로 다음달 4월 13일에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된다. 쑨원(孫文)과 잠자던 중국이 깨어났고, 인도에서는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이 다시 불붙었으며, 베트남, 필리핀, 터키, 이집트까지 인간 자존의 광복운동이 실로 세계적으로 펼쳐졌다. 이는 당시 제국주의 식민통치 하에서 신음하던, 세계 인구 3/4에 달하던 인류에게 증정된 한민족 발(發) ‘인간으로서의 자유 존엄의 실존 의지’였다. 이에 우리 한민족은 1929년,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헌정한 시처럼, 말 그대로 ‘동방의 등불’이 되었던 것이다.

혹자는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와 무오독립선언문의 영향, 고종황제의 인산일인 3월3일을 기하여 삼일만세운동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도 자신의 내적인 품성과 능력을 모르는 외세 일변도의 어리석은 해석일 뿐이다.

사진기, 핸드폰, 트위터와 같은 현대 문명의 이기가 없었던 100 년 전, 지금의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처럼 삽시에 전국으로 퍼져 나간 것은 무엇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모든 언론과 정보가 통제되던 그 시절, 마치 들불처럼 번진 3·1 만세운동은 경성에서 시작되어 원주, 해주, 전라남도 등지에서 하루, 이틀, 수일간 사이에 똑같은 선언문을 낭독하며 똑같은 태극기를 들고 떨쳐 일어난다. 또한 하와이와 미국본토, 일본, 러시아, 중국, 재외 동포들도 연이어 일어나니 이것은 그간 비축되고 쌓아져온 민족적 문화 역량이 아닐 수 없다. 

1919년 3월 18일 진주의 걸인 100여 명은 태극기를 휘날리며 “우리들이 떠돌아다니며 밥을 벌어먹는 것도 왜놈들이 우리의 재산과 인권을 빼앗아간 때문이며 나라가 독립하지 못하면 우리는 물론 2천만의 동포가 모두 빈곤의 구렁에 빠져 거지가 될 것이다.”고 외치며 거리를 누볐다. 다음날인 1919년 3월 19일 오전에는 한금화(韓錦花)를 비롯한 진주권번(기생조합) 소속 기생 50여명이 태극기를 선두로 남강 변을 돌아 촉석루를 향하여 행진하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일본 경찰이 김향화 등 진주 기생 5~6명을 붙잡아 구금했는데 한금화는 손가락을 깨물어 흰 명주자락에 “기쁘다. 삼천리강산에 다시 무궁화 피누나.”라는 혈서를 썼다.

진주의 삼대정신인 주체정신, 호의정신, 평등정신을 모은 즉, 국조 단군 47대의 홍익정신(弘益精神)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이제 진주는 다시 한 번 영광의 홍익도시가 되어 세계를 선도하는 대한민국의 정신과 욱일승천의 기상을 이끌어 가야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계명성 2013-09-27 18:57:55
강이식 장군의 혼이 다시 일어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