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충무공 김시민 장군과 진주성 전투
(2)충무공 김시민 장군과 진주성 전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1.06.12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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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시민이다" "젊은 이 몸, 나라에 바친다"

 원암 장영주와 함께하는 진주구경


▲ 충무공 김시민 장군은 철저한 준비로 1차 진주성 전투에서 당시 세계 최강인 왜군의 예봉을 꺾고, 첫 승리의 금자탑을 세우신 채 결국 그 전투에서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

임진왜란에 진주성은 두 번의 큰 전투를 치렀다. 1차 전투는 천신만고 끝에 승리하여 성을 지켜 냈고, 다음해 2차 전투에서는 패하여 3000여 명의 군인과 6만 명의 백성들이 모두 어육이 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지나는 동안 평생 벼슬 없이 학자요, 의병으로 살아온 선비 운봉 안방준(安芳俊)은 ‘운봉야사별록’에서 다음처럼 기술한다.

“만력(萬曆) 21년(1593년) 계사(癸巳) 6월에 왜적이 진주성을 함락시켰다. 성을 지키던 장수들이 여기서 모두 죽었다. 이보다 먼저 임진년(壬辰年,1592년) 여름에 적이 수륙으로 길을 나누어 호남을 침공하려고 꾀한 바 있었다. 한 길로는 한산도에 이르렀는데 수사(水使) 이순신으로 하여금 괘멸케 하였고 한길로는 진주성에 이르렀는데 판관(判官) 김시민(金時敏)으로 항거케 하였기에 적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일본 측에는 진주성 1차 전투의 패전이 이순신 장군에게 패한 해전의 패전보다 더욱 비중 있게 기록될 정도로 승승장구 하던 육전의 실패를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그런 만큼 희대의 잔인한 폭군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조선 침공 후 첫 육전의 패배를 안긴 진주성에 대한 강력한 복수를 원했고, 진주목사의 수급을 가져 올 것을 지시하였다. 뉘라서 그 무서운 명령을 거부 하겠는가? 자연, 일본군의 장수들에게는 ‘모쿠사(牧使)의 목’을 얻어 ‘도요토미’에게 바치는 영광의 공을 세우려는 공명심이 가득했다.

세계전사 중에서도 7만 여 명이 일시에 한곳에서 몰살을 당했다는 것은 드문 일일 진데, 2차 진주성의 전투가 그토록 잔인하게 진행된 가장 주된 이유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모두 아홉 분이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받으셨다. 아홉 분의 충무공중에 선조 대에 관련이 있는 분이 네 분이고, 임진왜란에 자신의 목숨으로 나라를 구하신 분은 두 분이시다. 두 분 모두 자신의 구상한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그 전투 중에 돌아가신다. 한 분은 육전에서, 한 분은 해전에서의 헤아릴 수없는 공을 쌓으셨으니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충무공 김시민 장군이시다.

김시민 장군은 1554 천안의 목천에서 출생하셨다. 24세에 무과에 급제한 뒤 1591년 진주판관이 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목사 이경(李璥)이 병사하자 그 직을 대리하면서 단 3천 5백 명으로 삼 만 명의 일본 정예군 중에 2만 여명을 괴멸, 패주시킨 명장으로 임진왜란 3대 대첩의 주인공의 한 분이시다.

이순신 장군보다는 9살, 토도요토미 히네요시 보다는 18살, 임진왜란이후 급성장을 하는 청나라의 누르하치보다는 5살 연하이며 나라를 혼란의 수렁에 빠트린 선조보다는 2살 연상이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의 침공을 결심하고 통상을 빌미로 장사꾼들을 시켜 한양을 60여회나 드나들게 한다. 조선 침공 로를 소상하게 제작하고 속속들이 연구를 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또한 그는 조선을 점령 한 뒤 조선 땅의 통치를 위해 조선 8도를 6색으로 구분하여 모든 작전 명령이나 공문서에 사용토록 명하는 등 사전에 철저한 준비를 하였다. 경상도는 백국(白國), 전라도는 적국(赤國), 충청과 경기도는 청국(靑國), 강원과 평안도는 황국(黃國), 함경도는 흑국(黑國), 황해도는 녹국(綠國)이었다.

그리고 모든 권력과 행정력을 총동원하여 거국적인 조선의 침공 준비를 재빠르고 강력하게 추진해나간다. 바로 그와 그의 어린 아들의 운명이 걸린 전쟁이기 때문이었다. 실패 한다면 현재는 충성을 바치고 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 (德川家康)’와 같은 범 같은 무신들이 바로 칼을 들이댈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은 역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우려대로 흘러간다. 일본 최후의 전쟁이라는 세끼가하라의 전투에서 그의 편은 패하고 만다. 결국 아들 히데요리는 자살을 하고 그토록 충성을 약속하던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손에 의하여 3대까지 모조리 죽게 되고 도꾸가와 이에야스는 쇼군이 되어 그의 가문에 의한 막부정치가 명치유신까지 약 250여 년을 이어간다.

신숙주(申叔舟, 1417~1475) 같은 분은 이미 일본을 조심하고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유언까지 하였으나 조선사회는 점차 존명사대 일변도로 쏠린다. 결국 신숙주 사후로부터 117년 뒤에는 임진왜란의 수렁으로 빠져들어 한반도는 차마 표현 할 길 없는 비극의 현장으로 화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김시민 장군, 이순신 장군과 수많은 장졸과 이름 없는 의병과 백성들이 목숨을 던져 백척간두에서 구원한 조선은 한사코 한(漢)족이 세운 명을 따르고 동이족의 나라인 후금을 오히려 멸시한다. 결국 청의 황제가 된 홍타이지에게 정묘, 병자호란을 당하면서 삼전도의 치욕을 겪고 말거니와 신숙주의 간절한 유언으로부터 435년 이 지난 1910년에 이르러 결국 일본에게 국체를 완전히 잃게 된다.

이는 선조와 대신들, 그 시대의 주인인 사대부 양반들이 자주정신을 잃고 문약에 흘러 국방마저 명나라에 의지하고 일본이나 여진족 등은 모두 공자, 맹자의 사서삼경도 모르는 야만인 오랑캐라고 깔보기 일 수였다. 혹 책임감 강한 무장들이 무너진 성과 낡은 무기를 손질 할라치면 고위층들이 나서서 역모를 의심하며 ‘백성이 불안 해 한다.’ 는 구실로 자신들의 당연한 책무인 군역을 흐지부지 흘려버리기 다반사였다.

1587년, 규슈정벌을 끝으로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드디어 조선에게 통신사를 파견 할 것을 요구 해온다. 이에 놀란 조선은 1590년 황윤길과 김성길을 파견하여 일본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진의를 파악하려 하나 1년에 걸친 방문 조사후의 보고는 ‘침략 가’와 ‘불가’로 갈리게 된다. 불과 임진왜란 발발 일년 전의 일로 그 급박한 시기에도 정파로 갈려 애써 위기를 무시하며 준비를 소홀히 하는 무산안일이 만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급박한 전시상황에서 김시민 장군은 철저한 준비로 1차 진주성 전투에서 당시 세계 최강인 왜군의 예봉을 꺾고, 첫 승리의 금자탑을 세우신 채 결국 그 전투에서 돌아가시게 된다. 연전연패로 몰살당하기 일쑤인 조선의 군대에게 당한 예상치 못한 일본군의 대 참패에 불같이 화가 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듬 해 15만 명이라는 대군을 몰아 진주성을 재차 침공한다. 진주성은 결국 패하고 처절한 복수를 당해 살아 있는 것은 사람 뿐 아니라 가축조차 모두 살해 되고 나무는 베어지고 우물까지 메워지는 살육의 현장이 된다.

“에비에비”라는 말은 본래 “이비이비(耳鼻耳鼻)”로 ‘ (일본군이 와서) ‘코와 귀를 베어 간다.’는 뜻으로 임진왜란의 산물이다. 38년 뒤, 병자호란에는 포로로 끌려간 많은 부녀자들이 돈을 주고 풀려나 다시 고향으로 귀환하게 된다. 이를 일러 ‘환향녀(還鄕女)’라고 하는데 품행이 좋지 않은 뜻의 ‘화냥년’이 되어 우리의 어두운 역사의 산물이 되니 알고나 써야 할 서글픈 단어들이다. ‘사서삼경도 모르는 섬나라 오랑캐가 감히 소중화국인 조선에 어떤 위해를 줄 수 있겠는가?’ 라는 자만심에 젖은 오만이 결국 임진왜란이라는 참화를 자초하고 이어 병자호란을 부르게 되는 것을 역사는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당시 일본은 경상도 사투리까지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통역관을 보유한 것에 비하여 조선은 중국의 완전무결한 짝퉁인 소중화(小中華)를 자랑하면서 여전히 일본을 야만시하고 일본인으로부터 배우기를 거부한다.  비극이라고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임진왜란을 겪은 뒤, 일본의 실권을 쥐게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내정 안정의 필요에 의하여 한. 일간의 국교는 회복되었다.

조선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통신사로 12회나 일본을 방문하여 장기간 여행을 하였지만 또 다시 일본의 어느 것 한 가지도 배우려 하지 않았다. 이에 반하여 일본의 지식인들은 거들먹거리는 조선의 통신사 무리들에게 비굴 할 정도로 배움을 요청하면서 은밀하게 실력을 쌓아간다.  이로서 300 여년 뒤에 기어이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원인이 된다.

그 뒤로도 36년 만에 어렵사리 나라를 되찾으나 이는 진정한 독립이 아니었으니 곧 강대국의 사상놀음으로 6.25 동란의 참극에 휘말리게 된다. 우리의 힘과 노력이 아닌, 외국의 도움에 의한 타율적인 독립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우리는 어떠한가. 민족은 남과 북이 갈라져서 다시 포를 쏘아대고, 남한내부는 동서로, 죄파와 우파로, 우파는 보수 우파와 뉴 라이트로, 사용자와 노동자로, 있는 자와 없는 자로, 종교와 종교가 갈라져 갈등하고 있다. 이렇게 시간은 흘러가면서 또다시 일본과 이웃 나라들을 바로 알고는 있는지 심히 우려를 하게 된다. 약간의 경제발전과 수출증진과 한류에 눈이 멀어 또다시 거들먹거리고 있지는 않는지?

이제 우리는 시작부터 다시 철저하게 배워가야 한다. 수적인 절대의 열세와 팽배했던 패배의식을 불굴의 의지로 불태워 철저한 준비와 강력한 리더십으로 승리를 일군 김시민 장군과 진주인의 정신에서 배워야한다. 진주성의 백성들은 그 당시처럼 일치단결하여 모든 어려움을 넘어서 김시민 장군의 공신교서를 일본으로부터 반환하였다. 뿐만이 아니라 임진왜란 시, 일본이 강탈해간 진주 연지사 종을 회수하려는 운동을 벌리고 있다. 그것이 바로 진주정신이다.
어느 날, 김시민 장군으로 생시처럼 간절한 당부의 말씀이 전해왔다.

‘김시민 장군으로부터 온 편지’

나의 사랑하는 진주 목의 백성들아. 나는 420여 년 전, 진주성에서 목숨을 내놓은 충무공 김시민이다. 나의 선조는 고려의 김방경 장군이시다. 동료들인 고려군, 삼별초를 치러 갈 때 눈물을 흘리시니 이는 곧 몽골의 협박 때문이었다. 결국은 일본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러 풍찬노숙 하면서도 국조 단군의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상해 임시정부를 이끌어 간 김구(金九)는 나의 후손이다. 

임진년 10월 5일부터 10월10일 까지 나와 진주성의 장졸과 백성들은 천신만고 끝에 여덟 배가 많은 3만여 명의 왜적을 물리쳤다. 나는 그 전투에서 이마에 총탄을 맞고 쓰러지니. 결국 39세의 나의 젊은 몸은 조선의 산하에 묻히게 되었다. 임금님으로부터 받은 나의 공신첩을 일본으로부터 다시 되돌려 받은 사랑하는 나의 진주 목의 백성들아. 장하고도 고맙도다.

이제 한 가지를 더 부탁하노니 귀를 씻고 가슴을 열고 들어주기 바라노라.
너희는 이제 이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진주개천대제를 단순한 볼거리로, 재미꺼리로 타락시키지 말기 바란다. 국조 단군의 효, 충, 도의 정신을 나와 너희들의 살과 죽음의 터전인진주성부터 바로 세워주길 바란다. 그것이 바로 나, 김시민으로 부터 비롯한 주체정신, 호의 정신, 평등정신의 진주정신이 아니더냐. 그리하여 스스로의 정신을 제대로 배우고 익혀서 다시는 이웃나라의 침탈을 받지 말고 강대국의 노리개가 되지 말기 바란다.

남의 정신으로 남과 북이 갈라져 싸우지 말고, 나라가 조각조각 떨어져 서로를 해치지 말고 홍익의 정신으로 세계의 평화를 너희 손으로 이루어서 모든 민족들로부터 세세손손 영광과 존경을 받기를 바란다. 그럴 때 나의 혼백이 기쁘게 그대들과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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