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열며-책이라는 물건
아침을열며-책이라는 물건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10.27 18:26
  • 14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책이라는 물건


우리 학회의 원로교수 한분이 선집을 출간하셨다. 80이 넘었으니 아마도 생애의 업적을 총정리한 셈일 것이다. 유학시절의 내 지도교수님도 작고하신 후 전집에 해당하는 ‘저작집’이 발간되었다. 내가 전공한 하이데거의 경우는 100권이 넘는 전집이 지금도 해마다 출간중이다. 나도 최근에 번역을 포함한 통산 19번째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리고 지금 20번째의 책을 집필중이다. 학자들은 아마 일생을 살고 책이라는 물건을 그 흔적으로 남기는 것 같다. 언젠가 나는 내가 쓴 시집에 ‘존재의 기념으로’라는 부제를 단 적이 있는데, 말 그대로 그 글을 내 존재의 기념으로 삼고 싶었다. 무릇 학문이나 문필에 종사한 사람들에게는 그런 책이야말로 최적의 기념이 되어줄 것이다. 이 신비로운 존재의 세계에 한동안 머물렀던 기념으로 책 몇 권을 남긴다면 그건 제법 의미있는 일임에 틀림없지 않을까.

물론 책이라는 것도 책 나름이긴 하지만, 우리 같은 인문학자들의 책은 교과서나 실용서와는 달리 ‘작품’이라는 의미를 띄고 있다. 그래서 그것들은 일종의 보편성과 영원성을 지닐 수가 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이 ‘존재의 세계’에 남게 된다. 그 중의 어떤 것들은 ‘고전’이 된다. 무상한 우리 인간들에게는 이건, 후손을 남기는 것 못지않은, 크나큰 의미가 될 수 있다.

그런데 그 책이라는 물건은 본질적으로 ‘읽히기’ 위해서 쓰여진다.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라면 그건 베게로 쓸 목침과 다를 바가 없다. 혹은 그저 좀 ‘있어’ 보이기 위한 장식품에 불과할 것이다. 그래서 문제다. 요즘 이 책이라는 물건을 읽는 사람이 도통 없는 모양이다. 책은 다른 물건들과는 달리 그 안에 무궁무진한 내용이 담겨 있다. 그것이 우리의 정신을 살찌우고 인간의 격을 높여주게 된다. 그러니 그것을 읽지 않는다면 그건 좀 문제인 것이다. 정신을 포기하고 질과 격과 수준을 포기하는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의 문제의 일단이 거기에 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우리 사회가 총체적으로 천박화의 길로 치닫고 있다. 온통 ‘돈’밖에 없고, ‘나’밖에 없다. 돈 이외의 모든 가치들이 외면당하고 이윽고는 가차없이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시커먼 욕망들이 거의 온 세상을 지배한다. 바야흐로 욕망의 천국이다. 정신적 천민들의 독재가 점점 현실이 되고 있다. 그들에게 책 따위는 아예 관심 밖이다. 이대로가 좋다면 도리 없지만 그래도 인간이기를, 인간다운 인간이기를 기대한다면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책을 읽고 그리고 그 인간의 내면을 가꾸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저 한탄만 하고 있을 수도 없다. 사람들을 향한 ‘책의 유혹’도 필요해 보인다. 관심을 끌만한 내용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책이라는 물건을 한 권이라도 써본 사람은 알지만 그건 정말이지 쉬운 일은 아니다. 작가의 영혼을 먹처럼 갈아서 쓰는 것이 책인 것이다. 아니, 그렇게 써야 비로소 책인 것이다. 그런 책을 누군가는 써야 한다.

그리고 그런 책을 우리는 알아줘야 한다. 책을 알아준다는 것은 읽어주는 것이다. 그런 사회적 풍토랄까, 분위기랄까, 환경의 조성이 절실해보인다. 책 한권을 쓴다면 적어도 그걸로 입에 풀칠은 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숫자의 독자들이 있어야 한다. 참고로 이웃 일본에서는 모든 주요 일간지들의 1면 하단에 반드시 책 광고가 있다. 거의 불문율이다. 그들은 지금도 책을 사고 그리고 읽고 있다. 미운 짓 많이 하는 그들이지만 이런 건 정말 배울 점이 아닐 수 없다.

수요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공급이 뒤따른다. 우수한 독자는 우수한 작가를 탄생시킨다. 이른바 독서의 계절이라는 가을이다. 그러니 한번쯤 자기를 뒤돌아보자. 그리고 자문해보자. 나는 과연 ‘독자’인가. 나는 최근에 몇 권이나 책을 읽었는가. 그리고 무슨 책을 읽었는가. 나는 과연 나의 정신에, 나의 수준에 나의 질과 격에 관심이 있는 건가. 나는 도대체 어떤 인간인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